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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ug 28. 2019

진지하지만 우습다

_이사카 코타로 「마왕」

세 번째 읽었다. 작년에 처음 읽었던 책인데, 오랜만에 다시 책장에서 꺼냈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책들 중 하나였는데, 가장 좋아하는 일본 책이 되었다.



"애당초 죽은 형이 나한테 붙어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상한 걸까?" 준야가 씁쓸하게 웃기에, 나는 "오빠가 준야를 못 본 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하고 변명처럼 말했다. "겨우 죽었다는 이유로."
준야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맞아. 겨우 죽었다는 이유로 나를 못 본 체 하지는 않을 거야."


환상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초능력이 나오질 않나, 장면이 갑자기 전환이 되질 않나,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반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회와 개인이다. 엄근진*하다.


 *엄근진 :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진지함과 가벼움이 뒤섞여 있다. 책은 형 안도의 이야기와 동생 준야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다. 형이 계속해서 스스로 되는 건 '생각해'다. 반면 동생이 도박에 돈을 걸며 하는 말은 '생각하지 마'다. 이 두가지 삶의 태도는 정반대인 것 같으면서 절묘하게 연결된다.


논리적으로는 관련없는 장면들이 묘하게 겹쳐진다. 한심한 과장은 부하직원을 혼내며 이야기한다. '각오는 되어있겠지?' 그리고 전체주의와 맞서는 안도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매, 있어?" 나는 준야한테서 쌍안경을 받아들자마자 위쪽으로 자세를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은 제법 나오고 있어. 비가 그치고 나서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상승기류가 발생하고 있으니까."
"발생하고 있으니까?"
"그걸 타고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는 거야. 녀석들은 높은 효율로 날 생각밖에 하질 않으니까. 이런 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지.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올라갔다가 목적지까지 슝하고 떨어지는 편이 편하니까."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구나, 새가."
"그런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


파편적으로 던져진 여러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항상 자기전에 사오리가 말하는 말이 있다. '소등입니다.' 아무리 졸려도 습관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안도는 아스팔트에 쓰러져 눈을 감으며 말한다. '소등입니다.'


전체주의라는 어려워 보이는 주제가 관통하는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장면들이 중간중간 들어간다. 심각한 얼굴의 형 안도의 얼굴을 보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동생 준야처럼. 큰 구조와 작은 구조 비슷하게 겹쳐진다. 전혀 똑같지 않지만 반복된다.


어두운 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말을 몰고 있다. 그가 아들에게 묻는다.
"아들아, 왜 얼굴을 가리느냐?"
"아버지, 보이지 않아요? 관을 쓴 마왕이 있어요." 하고 아들이 대답한다.
"그건 안개란다."
"아버지, 들리지 않아요? 마왕이 무언가 속삭여요."
"마른 잎의 소리란다. 진정하렴."
"아버지, 보이지 않아요? 마왕의 딸이 있어요."
"보이지만, 저건 버드나무란다."
"아버지, 이제 마왕이 나를 붙잡고 있어요."
슈베르트의 <마왕>. 음악실에 있던 우리는 노래를 배운 뒤 경악했다.
그 구원할 길 없는 절망감과 두려움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와 닮았다.
그 가곡 속의 아이는 바로 지금의 나다.
마지막에 아이가 어떻게 됐지?
나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어느 순간 만약 내가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혼자 말했다.



처음 읽었을 때도 좋았고, 이 책으로 팟캐스트 방송도 했다. (여기 목소리가 나다ㅋ) 지금은 그때 이상으로 감동 받은 상태다.



★★★★★★ 별을 다섯 개까지만 준다는 게 아쉬워서 하나 더 준다. 장수돌침대 이상이다.




드디어 만화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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