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박민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이렇듯
천하장사 두 개를 쥐고 벤치에 앉아 있으니 인생이 끝장난 기분이다. 오후 다섯 시고 여태 점심을 못 먹었다. 일단 우유를 따고, 나는 말없이 소시지의 비닐을 벗긴다. 누가 볼까 두렵기도 하다. 쉰을 넘긴 거구가 숨을 몰아쉬며 소시지를 까고 있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 있고 굶주린 아랫배가 턱, 허벅지에 얹혀 있다. 이보다 더 좆같은 풍경이 세상에 있을까 모르겠다. 덮다. 정말 최악의 날씨다.
_박민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니미럴
나는 다시 이마의 땀을 닦는다.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결론은 한 가지다. 나는 끝났다. 끝장난 인생이다 집에 들어갈 일이 걱정이다. 아니,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이다. 적금이고 카드고 최후의 보루조차 사라진 인간이다. 아들이 이제 대학생인데... 늦둥이는 내년에야 중학생이 되는데... 주위 눈치나 살피며 몰래 똥구멍이나 긁고 있다. 차를 한 대만 팔 수 있다면, 다시 예전처럼 판로란 걸 찾을 수 있다면... 그래, 노숙자의 좆이라도 나는 빨겠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느 놈은 예능 늦둥이가 되어 세상을 휩쓴다는데, 어느 놈은 비극 늦둥이가 되어 이 지랄을 떨고 있다.
_박민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달에 갔다고?
그렇다네.
거길 어떻게.
네비에 찍고 줄곧 가면 나온다네.
산소도 없잖나.
먹고살아야 하는 마당에 산소 따지게 생겼나?
니미럴.
거긴 아직 경쟁이 심하지 않아. 살 만한 놈들이 거길 갈 리 없으니까.
그나저나 거기에도 뭐가 사나?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살아. 게다가 돈도 꽤나 돌더라구.
많이 팔았나?
제법 팔았네, 숨통이 확 트였다니까.
내가 알기론 우주엔 암흑물질인가 뭔가, 또 태양방사선이니 뭐니 겁나 위험한 곳이라던데.
여기서 돈 없이 사는 거보다 위험하진 않네.
니미럴, 방사선에 뒈지면 어쩌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느 쪽도 사과하는 놈 없기는 마찬가지지.
_박민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차도 안 막히고 해서
생각보다 일찍 나는 화성에 도착했다. 망할 놈의 신호도 없었고, 달리 졸음이 오지도 않았다. 점심 때나 되었을까? 시계는 멈췄지만 아무튼 그런 기분이었다. 고요했다. 그리고 조금은, 겁이 났다. 낯선 행성의 풍경을 바라보며 우적우적 삼각김밥을 씹는 기분을... 누가 알까. 차창을 열기도 겁이 났지만 어쩌겠는가, 참치 마요네즈와 불닭의 에너지를 빌어 나는 우뚝 차에서 내려섰다. 헉. 겁나 춥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딴 환경이 먹고살겠다 발버둥 치는 인간의 결심을 또 어떻게 이기겠는가. 주위를 둘러보며 휴,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해본다. 어디서나 서민은 적응해야 한다. 적응도 못하는 서민은, 죽어야지 뭐.
적응 끝났다.
_박민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