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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r 26. 2021

유퀴즈?

군대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

군대에서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건 면회도 아니고, 휴가도 아니고, 토요일에 다같이 TV 보는 시간이었다. 전역을 하고 나서도 가끔 생각난다. 매일 아침 엠넷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루에 비 노래(뤠이니즘)를 열 번도 넘게 듣고, 이효리 노래(유고걸, 치리치리뱅뱅)를 열 번도 넘게 듣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주말의 TV 시청은 달랐다.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MBC를 틀어놓고 정해진 시간만 기다렸다.


쇼!음악중심

우리결혼했어요

무한도전


일주일 내내 생활관에 누워서 빈둥거렸는데, 토요일에는 특별히 위 3가지 프로그램을 연달아 보기 위해서 생활관에 누워서 빈둥거렸다. 다같이 낄낄 거리고 다같이 욕하고 다시 다같이 낄낄 거렸다.


쇼!음악중심 : 신병이 들어오면 소녀시대 중에 누굴 제일 좋아하냐고 묻던 시절이었다. 나는 잘 몰라서 땀을 뻘뻘 흘렸다. 살면서 가장 음악을 많이 듣는, 뮤직비디오를 가장 많이 보는 순간은 군대다. 권태에 빠져 무기력하게 들었다. 멍하니 엠넷을 보는 시간이 길었는데, 비와 이효리, 빅뱅과 다비치가 잘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결혼했어요 : 가인/조권 커플을 보면서 설레고 이준/오연서 커플을 보면서 가슴 아팠다.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나 마음은 계속 로맨스를 꿈꾸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찌보면 그래서 더 힘든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나 봤으면 나았을 텐데. 실제로 절망의 사막에서 걷기만 하는, 오아시스 없는 소설 「로드」나 학살의 소나기에서 우산도 없이 버티는 실화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사막 바깥이나 수용소 밖에서는 읽지 않았을 책이지만, 당시에는 별 감흥도 없이 읽었다.


무한도전 : 노홍철의 장사꾼(사기꾼) 기질, 재판정에서의 논리 싸움, 예측하기 어려운 추격전. 무한도전의 전성기였다. 모든 예능에서 꺼리는 정치적 이슈와 선거까지도 흥미진진한 오락거리로 보여줬다.


한 명이 푸하하 터지면, 나도 질세라 푸하하 웃어버렸고, 아휴, 하고 한숨이 나오면 이에 질세라 나도 무릎을 쳤다. 동질성이 높은 집단이라 그런지, 우리끼리의 공감 능력은 매우 높았다. 그렇게 시끌벅적 웃고 놀다보면,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일요일이 되기 직전이었다.


일요일처럼 여자친구는 내게 왔다. 요즘 내 삶의 낙은 여자친구와 밥 먹으면서 유퀴즈를 보는 거다. TV 없이 살아서 유퀴즈는 짧은 유튜브 영상(MEME)으로만 봤었다. 여자친구가 TV를 가져오면서 BTV가 들어왔는데, 신통하게도 예전 방송을 찾아볼 수가 있다. 토요일까지 꼬리 흔들며 생활관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에 식사시간이 되면 리모콘에 대고 유. 퀴. 즈. 라고 말하면, 알아서 찾아준다. 요리가 준비되면 유퀴즈를 튼다. 아직 안본 회차를 찾아서 클릭한다. 연예인이 나와서 누구랑 친분이 있느니, 무엇을 샀느니, 어디 여행을 갔느니 과시하는 걸 보기도 질린 터였다. 서예가, 청와대 요리사, 분쟁지역 PD, 소설가, 라면 개발자, 책바 사장 등 각양각색의 비연예인이 나와서 자신의 전문분야를 이야기해준다. 연습생 기간이 길어서 힘들었다고 하소연 하지도 않고 개인기와 애교를 준비하지도 않지만, 주어진 시간인 20~30분이 너무 빨리 끝나서 항상 아쉽다.


재미있다 싶으면 고개를 돌려 여자친구를 본다. 활짝 핀 표정을 보고 나도 재미있어, 너도 재미있지? 하고 확인한다. 안타까운 장면에서도 고개를 돌린다.  찡그린 표정을 보고, 아프냐, 나도 아프다*, 고개를 끄덕인다.

 

 * 2003년 유행하던 다모 패러디다. 오늘은 복고 느낌이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유퀴즈? 타임이다. 참가자들의 인터뷰가 끝나면 마지막에 퀴즈를 내는데, 맞추면 상금을 준다. 똑똑한 남자친구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러러 보던 여자친구는 이제 없다. 꼬실 때 쓰느라 내 지식도 바닥났고, 가끔 어디서 주워들어 새로운 걸 꺼내놔도 시큰둥이다.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극적인 수단을 동원하듯이, 나는 정답을 외친다. 십중팔구는 맞춘다.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던 여자친구 이제 심드렁하다. 이래서 북풍*에 손을 대는 건가. 한나라당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북풍 : 선거가 다가오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 북한의 도발과 위협을 활용하는 걸 말한다. 평화의 댐 사건, 수지김 간첩조작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1997년에는 한나라당에서 북한에 총도 좀 쏘고 무력시위도 해달라고 직접 부탁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이후 거의 불지 않고 있다.




1. 군대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

2. 군대에서 가장 참담했던 기억

3. 군대에서 가장 축구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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