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는 성격이 있다. 내꺼니꺼 따지기 싫어서 그냥 주어버리고 마는 그런 성정. 어머니가 그랬고, 내가 그렇다. 어린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머니가 뭘 내꺼라고 주장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이건 내 생각이야, 이게 내 주장이야, 이건 내가 만든 거야, 내가 하자고 한 거잖아! 이런 주장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다. 따뜻하게 표현하면, 관대하고 너그럽다. 차갑게 분석하자면, 회피적 성향이거나 안정적 성향이다.
회피적 성향
내꺼니꺼 따지는 갈등이 두렵고 차라리 손해가 편한 거라면, 회피적 성향이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는 회피적 성향이다. 에라, 내가 그냥 주고 말지~ 하고 주어버린다. 최근 자존감 관련 책을 읽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인은 자존감 부족이라고 진단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향은 선천적으로 결정되지만, 어느 정도 바뀔 수 있다.
서희
합리적인 사료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 상상해보았다. 싸우자고 왔다가 강동 6주를 서희에게 헌납한 거란 장수 소손녕은, 분명 회피적 성향일 거다. 고려에서 자꾸 우리 거란을 자극한다고, 가만 있으면 우리가 뭐가 되냐고, 상사가 쪼니까,그리고 먹여살릴 자식들과 기다리는 대출이자 때문에 병력을 이끌고 출장 오기는 했지만, 싸움은 무섭고,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나,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마침 대전 상대인 서희가 싸울 마음이 없다고 나온 거다. 옳다구니~ 하고 원하는 바를 들어준 게 아닌가 싶다.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소씨지만, 소손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암튼
나도 비슷하다. 손해와 함께 살아왔다. 당근마켓은 무료나눔 마켓으로 활용하고 있고, 독서모임에서는 책을 선물하고 사진을 찍어서 나눠주고 있다. 따뜻하게 포장하면,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회피적 성향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생색은 좀 낸다.
안정적 성향
드러나는 현상은 비슷하지만, 안정적 성향인 사람도 손해를 본다. 표정은 다르다. 이 정도는 줘도 괜찮으니까, 하며 줘버린다. 이걸 내가 우겨봐서 뭐 하겠어, 얘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하며 털어버린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 생색도 내지 않는다.
이완용
합리적인 사료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 상상해보았다. 이 정도는 줘도 되겠지, 하며 대한제국을 염가로 넘겨버린 이완용은, 분명 안정적 성향일 거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일찍 출세했고, 검소하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본래부터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친청, 친미, 친러를 거쳐서 친일에 정착했는데, 조선을 여기저기 다 나눠주려 했던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당근마켓 하듯이 나눔을 실천한 건 분명 타고난 성향 탓이라는 게, 내 강력한 상상이다. 그러면 뭐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다. 나누기를 좋아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이태원댄싱머신의 이는 이완용의 이와 전혀 관련이 없지만, 왠지 남 같지 않고 친근감이 든다.
나도 어머니처럼 내 성향을 조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손해보는 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기왕이면 회피적 성향보다는 안정적 성향으로 포장하는 게 그럴 듯하게 들린다. 마음이라도 대범하게 가지자. 이렇게 합리화하니 새삼 당당해진다. 누가 나라를 훔쳐가도 너그럽게 받아줄 것 같은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박민규
소설가 박민규는 손해보기의 이로움을 설파한다. 소중한 일에 집중하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머지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긍이 간다.
올해로 마흔두 살이 되었다. 지극히 간단한 생활을 하지 않고선 읽고, 쓰는 시간을 얻을래야 얻을 수 없다. 지난 몇 년은, 즉 아무 일 없이 읽고 쓰는 생활을... 그런 습관을 마련하려 애쓴 시간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워야만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볼일을 만들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다. 겸손해진다(시간 외에에도 많은 것을 절약해준다). 생깐다(경조사들!). 그래요, 당신이 옳아요 라고 말한다. 양보한다. 손해를 본다(정말 많은 것을 절약해준다).
피치 못할 일들이 그래도 가끔 생기지만, 덕분에 내 삶은 지극히 간편해졌다. _박민규 「자서전은 얼어 죽을」
시간집착적 성향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요새 들어 많이 한다. 자전축이 이동하지 않는 한, 갑자기 하루의 시간이 부족해질 리는 없다. 생각하고 집중할 시간이 부족한 거다. 그게 신춘문예든, 똘똘한 한 채든, 공무원 합격증이든 말이다.
손해보는 삶도 좋다. 오히려 더 많이 손해보고 싶다. 돈이든 성과든 남에게 다 줘버리고 싶다. 생각하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그 생각을 정리하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과 맞바꿀 수 있다면, 그깟 손해쯤이야. 그러면 나도 이완용처럼, 아니 박민규처럼 감탄이 나오는 글을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