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겨우 일주일에 하루, 단 50분이면 녹초가 되기 충분하다. 다른 사람은 이걸 쓰러지지 않고 어떻게 견디는 거지? 놀라면서 따라가고 있다. 필라테스가 끝나면 인바디*를 측정하는 기기가 있다. 정기적으로 수치를 보다보니, 욕망이 생긴다. 어떤 수치는 낮추고 싶고, 어떤 수치는 높이고 싶다.
인바디 : 몸에 전류를 흘려서 근육과 지방의 양을 측정한다. 근육은 전류가 잘 통하고, 지방은 전류가 잘 통하지 않는데, 이 성질을 이용한 거다. 수분도 전류가 잘 통한다. 짠 음식을 많이 먹었거나, 생리 중이어서 수분이 많은 상태라면, 근육이 과대평가될 수 있다. 가급적 공복에 재는 게 좋다.
과학자들은 세상을 수학으로 인식한다. 세상의 시작, 움직임, 영향, 결과까지 모두 수학으로 표현한다. 수학은 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핵심도구다.
운동을 하면, 과학자도 아니면서 세상을 수학으로 인식한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스스로를 수치화한다. 옷의 사이즈, 키와 몸무게, 근육량, 체지방으로 시작한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더니, 구구단 외우듯이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한다. 그 반갑던 치킨이 이제 그냥 245.9kcal/100g의 유혹으로 전락한다. 나이가 드니 조금 더 복잡해진다. 혈압, 심전도, 콜레스트롤, 백혈구 등으로 내 몸은 조각조각난다. 심지어 정신적인 고뇌도 스트레스 지수란 이름으로 가시화한다.
수치는 올려야 하거나, 낮춰야 한다. 행동을 통제하고 한계를 넘어서 목표수치를 향해 달려간다. 운동은 거부할 수 있어도, 수치는 거부할 수 없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면, 고문후유증과 함께 민주투사라는 찬란한 이름을 얻을 수 있다. 화가 나면 신나게 욕을 퍼부으면 그만이다. 대통령 욕만 해도 잡혀가는 세상이었으니, 속으로만 말해야 했지만 말이다. 이제 운동을 거부하고 수치에 항거하면, 미련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내가 운동을 안했는데, 누구 탓을 할 수 있으랴. 체념 뒤에 오는 건 자책뿐이다. 대통령 욕을 큰 소리로 해도 잡혀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나, 이제 남 욕은 스트레스 지수 감소에 일시적으로 도움을 줄 뿐이다. 오늘 얼마나 걸었는지 알려주는 어플도 있다. 친절하게도 소액이지만 금전적 보상까지 해준다.
이제 우리는 세분화된 수치가 되었다. 수치화는 어디까지 진행이 될까. 어쩌면 우리가 단 하나의 수가 될 때까지 달려갈지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숫자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학교(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대박!), 그리고 군대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숫자가 된다면, 다루기 좋은 형태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숫자는 측정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고, 다른 숫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숫자는 비극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극은 전부 숫자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현대 운동에서 정말로 필수적인 장비는 숫자뿐이다.
_마크 그리프 「모든 것에 반대한다」
텀블벅 수치가 안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