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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y 22. 2021

중대한 결정은 언제나 이렇게

압구정이다. 일 때문에 왔다. 일 끝나고 잠시 쉬러 블루보틀에 들어왔다. 나는 월급루팡이기 때문에 잠시 쉬는 경우가 많다. 있어 보이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철학책을 꺼내서 읽고 있다. 읽다가 지루하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연예인 누가 죽었다더라, 연예인 누가 학교폭력 가해자더라, 연예인 누가 거짓말을 했더라... 한 손에는 철학책을 놓지 않고 인터넷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어푸어푸 겨우 정신을 차려서 고개를 돌리면, 이미 너무 많이 떠밀려 왔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더라.. 해안가는 저어 멀리 보인다. 다시 집중해서 책을 읽는다. 지루해지면 다시 어푸어푸의 반복이다.


옆자리에는 한 커플이 셀카를 찍고 있다.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떨며, 그 와중에도 부단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얼짱 각도를 맞춘다. 그렇다. 나는 일 핑계로 압구정에 와서 지금 두 시간째 빈둥대고 있다. 월급루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행동양식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한병철이다. 한병철은 셀카를 공허한 자아의 표식으로 보았다. 뭐든 화사하고 매끈하고 깔끔하게 만들어서 사진을 찍고 전시하는 행위를 현대사회의 병폐, 일종의 전염병으로 보았다.


바로 이런 불안함, 자신에 대한 근심이 셀카 중독을, 전혀 끝날 줄 모르는 자아의 공회전을 낳는다.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_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처음 어쭙잖게 철학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루종일 셀카나 찍는 사람은 내면이 공허할 거야. 나처럼 어려운 책을 읽고, 철학과 사회와 문학(역사는 극혐!)을 논하는 사람은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지. 책을 많이 읽고 더 그럴 듯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자만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느낀다. 찰칵 소리만 안났지, 나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얼짱 각도를 맞추고 있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볼지 생각하면서 철학책을 들고 다니고, 읽는다. 어쩌다보니 아는 건 많아진다. 이렇게 만든 지식 체계는 아는 척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뇌색남이라 불러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하지만 잘난 척할 때를 제외하고, 뇌는 우동사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원래 명문대생은 명문대 출신 빼고 내새울 게 없을 때 불리는 명칭이다. 나도 비슷하다. 그나마 뇌가 제일 이뻐서 뇌색남이라 불리는 것에 불과하다. 나도 이뻤으면 분명 셀카의 세계로 풍덩 몸을 던져 아푸아푸 대양을 건넜을 게 분명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성형을 해서 이뻐지는 게 어떨까. 그러면 철학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을텐데 말이다. 가끔 책이 무겁다는 생각이 다. 얼굴이 이뻐지면 뇌색남이고 요색남이고 다 필요없다.


해류는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를 떠민다. 그래, 여기는 성형의 메카 압구정이지. 성형을 해야겠다.


중대한 결정은 언제나 이렇게 즉흥적으로 내리는 편이다.



즉흥적인 텀블벅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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