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보통은 외국영화를 본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상 받은 걸 찾아보다 보니 그렇게 된다. 오늘은 「발신제한」을 보았다. 조우진 주연의 스릴러다. 평소 조우진을 좋아하기 때문.. 은 아니고 아내가 선택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권력이 사라지면, 이렇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좀 애매하다. 어설픈 느낌이 든다. 아침에 운전해서 출근하는 길인데, 누가 전화를 하더니 다짜고짜 차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우기는 거다. 실소가 나왔다. 설마 이렇게 하면 관객이 몰입이 될까 걱정될 정도였다. 주인공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뒷자리에는 딸이 두꺼운 책 「코스모스」를 읽고 있어서 조금 불안한 정도였다. 아 혹시 모르니까 잠깐만 기다려보자. 일단 나가지마. 하며 자녀를 저지하는 조우종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관객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폭탄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화를 믿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주인공의 눈 앞에서 차문을 열었고 바로 폭발했다. 불타는 자동차를 마주하고, 이제는 주인공도 관객도 심각한 얼굴이 된다.
아직까지는 스포일러 아니다. 조금 이따가 할 예정이다. 영화는 폭탄협박납치극이다. 지금 차에 폭탄이 들었어!! 돈을 보내라고!! 예상대로 악당은 주인공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고, 주인공은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다. 주인공은 어리숙한 고객에게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PB센터 센터장이다. 즉 나쁜 짓을 하기에는 최적화되어있다.
복수극
과거의 피해자가 악당이 되어 나타나는 영화는 많다.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이 경우 악당은 보통 죽는다. 나쁜 놈이 사람을 다 죽이고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영화를 우리 사회는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악당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는다. 중요한 건 주인공이다. 과거의 가해자가 영화의 피해자가 되어서,탈탈 털리고 나서, 뒤늦게 잘못을 깨닫게 된다. 나름의 방식으로 속죄를 하는 게 영화의 핵심 장면이 된다.
그리고 이제 스포일러다. 영화 볼 사람은 아래 내용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이 영화는 볼만하다.
=====스포일러======
=====스일포러======
=====스포일러======
영화에서 협박범은 주인공의 차량에 폭탄을 설치하고 딸을 인질로 잡고 있다. 여기서 나는 멋진 속죄 장면을 상상했다. 그래서 조우진이 차를 몰고 바다로 돌진하기를 바랐다. 내가 죽을게!! 내 딸은 살려줘!! 돈 좀 벌자고 남에게 위험한 금융상품을 팔던 사람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의인이 되는 거다. 하지만 비장한 장면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비극을 겪고 혼자 살아남아서, 또 다른 비극을 만들었던 협박범은 주인공과 함께 생을 마감하려고 했다. 이 진창에서 주인공은 혼자만 살아남는다. 「코스모스」. 이 두꺼운 책으로 폭탄이 터지지 않게 어찌어찌 처리해서 결국 구질구질하게 살아남는다.
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바랐기 때문인지, 마지막 장면에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살아서 결국 혼자 잘 먹고 잘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면서, 그렇게 그냥 살겠다고? 그게 속죄인가? 화가 났다. 주인공이 미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속죄다. 내가 나쁜 짓을 했으니 죽는다? 이게 아주 간단하고 확실해 보인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통쾌하다. 시각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속죄는 조금 더 구질구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효과적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반성하고 괴로워하고, 그리고 저지른 잘못을 어느 정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속죄는 그런 것이다.
조민기
영화배우 조민기는 딸과 오랫동안 예능에 출연하면서 좋은 아빠 이미지를 쌓았다. 그럴듯한 가정에 바람직한 아빠였다. 2018년 폭로의 글이 올라왔다. 미투운동이었다. 학교에서 습관처럼 성추행과 성폭력을 일삼고 자신의 권력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던 사실이 온세상에 밝혀졌다. 학교의 학생은 한두 명이 아니고 당연히 피해자도 한두 명이 아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벌을 받고 반성하길 원했다. 그걸 통해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고 또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죽음. 조민기는 끝끝내 자신만의 동굴로 도망처버렸고, 피해자들은 치유의 기회를 영영 잃었다. 이제 가해자 욕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납치극이라는 비현실적인 영화에 빠져서 올드보이 같은 결말을 기대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래 이게 현실적이지. 이게 속죄지. 주인공을 동정했다가 주인공을 비난했다가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에 몰입해 정신 못 차리게 하다가, 어느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나는 괜찮은 영화라고 본다.
영화는 끝났지만, 한참동안 말 없이 한숨만 쉬었다. 악착같이 살아남는 조우진이 너무 밉고, 협박범에 시달리면서 가족의 고통에 괴로워했던 조우진이 너무 불쌍했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직장이라는 든든한 방패 뒤에서 나쁜짓을 하기는 쉽다. 나도 가끔 한다. 나라면 속죄할 수 있을까. 악의 고리를 끊어서 비극을 멈추고, 스스로 행한 잘못을 어느 정도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 으앗!
한숨만 쉬고 있는 나를 못 참겠는지, 아내가 귀를 물었다. 으윽! 귀를 부여잡고 다시 영화를 생각하며 심각한 얼굴을 하면, 아내는 연거푸 귀를 물었다. 여러 번 물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느닷없는 영화를 선택해서 정신없이 보게 하고 어느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아내, 나는 괜찮은 아내라고 본다. 으악!
암튼 조우진은 「코스모스」 덕분에 살았다. 나도 다시 읽어볼까나.
★★★★★ 영화에 몰입해 정신 못 차리게 하다가, 어느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나는 괜찮은 영화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