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 대선 결과였다.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일까. 여론조사는 줄곧 그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나는 설마 설마 했다. 젠더가 의제화되고 여혐을 표방하는 대통령 후보가 떡하니 당선.
토론회를 통해서 본 윤석열은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다. 잘 모르니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데, 잘 모른다는 게 티 날까봐 이상하게 당당한 태도를 표방했다. 모른다는 말도 못 하고 잘못했다는 말도 못 하는 태도. 이건 겁쟁이다. 겁이 많아서 억지로 당당한 사람은 약자 앞에서 잔인해진다. 무서워서 더 가혹해진다.
일찌감치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니, 이미 선거는 내 관심 밖이었다. 투표 당일에는 푹 쉴 수 있는 휴일이라고 좋아했다. 수요일에 쉰다니, 이틀 일하고 하루 쉬고, 또 이틀 일하면 주말이다. 출구 조사가 나오고 아슬아슬한 상황을 알게 되니 뒤늦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진짜 윤석열이 되면 어떡하지. 그냥 이재명 뽑을 걸 그랬나.
나는 1번도 2번도 뽑지 않았다. 나는 다당제주의자다. 다양한 정당이 합의를 통해서 정권을 운영하는 사회를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언제나 소수정당을 찍는다. 소수정당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이용할까만 고민하는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은 가능하면 찍지 않는다. 보수당(국민의당)은 그냥 안 찍는다. 이유는 없다. 아마 빨간색이 약간 빨갱이 같아서 기분 나쁜 것 같다.
신념대로 투표하면서도 기분이 착잡하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건가. 아 그냥 민주당을 찍어줄 걸 그랬나. 망설이다 결국엔 사표다.
이번에는 유독 많이 고민했다. 이재명이라는 인물이 너무 괜찮아 보였다. 그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서민과 노동자의 대표였다. ‘엘리트인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줄게.’ 가 아니라 ‘우리는 할 수 있어. 내가 대표로 할게.’ 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 많지 않다. 게다가 민주당 답지 않게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위성정당을 만들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깨부수는 민주당을 민주당 안에서 비판했다. 반대세력이 만만치 않지만,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보유세 강화를 주장하는 것도 당당하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닷페이스에 출연한다. 적어도 배우는 자세는 이뻐보인다.
하지만 인물론은 경계해야한다. 의회민주주의인 대한민국에서 인물론은 정치 지형을 왜곡시켜 보여준다. 이재명이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는 거다. 윤석열이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대통령이 되면 보수당(국민의힘)이 집권하는 거다. 윤석열의 무지함을 보고 새로운 정부 걱정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어차피 각 분야 전문가들이 맡아서 담당한다. 적어도 박근혜 정부나 이명박 정부 정도로 운영해낼 수는 있을 거다. 중요한 건 정당이다. 인물은 무시하고 정당만 보고 뽑는게 합리적이다.
내가 뽑은 사람이 대통령이나 시장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찍으면 무조건 사표다. 작은 선거에는 선택지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아쉬운 마음으로 잘 모르는 당을 찍기도 한다. 가끔 이상한 사람이 당선된다. 신념대로 뽑으면 사표가 되고, 불필요한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시스템에 있다.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 선거와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가 문제다.
프랑스처럼 결선투표가 있는 나라는 누구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준다. 1번이 싫어서 2번에 투표하는 건 나중으로 미룰 수 있다. 투표결과가 나오고, 만약 1위 후보가 과반수 이상을 득표하지 못 했다면, 2차 선거를 진행한다. 1위와 2위만 다시 한 번 붙는 거다. 이번에는 정말 대통령이 될 사람을 뽑는다. 한국은 이게 안 된다.
내가 3번을 지지하든 4번을 지지하든 가릴 것 없이 2번이 너무 싫으면 1번을 찍게 된다. 어차피 3번, 4번이 대통령 될 리는 없고, 1번 아니면 2번일텐데, 나 때문에 2번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 1번에게 표를 던지는 거다. 당연히 선거운동은 네거티브로 가게 된다. 일단 2번 후보가 얼마나 엉성하고 부족하면서 염치없는지만 밝히면 어차피 3번이나 4번을 지지하는 사람도 1번을 찍게 되어있다.
국회의원 선거는 더 심각하다. 일단 한 명만 뽑는 소선거구제다 보니,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사표 문제가 생긴다. 소수정당 지지자도 어쩔 수 없이 최악을 막기 위해 1번이나 2번을 찍게 된다. 소선거구제가 지역주의와 만나면 최악의 구도가 완성된다. 예를 들어 광주라면 민주당이, 대구라면 보수당이 우세다.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면 후보자가 뇌물을 받든 돼지발정제를 먹이든 상관없이 우세정당 후보자가 당선된다. 어차피 공천권은 당이 쥐고 있다. 사람들이 뭐라해도 당선이라는 결과는 바꾸지 못 한다. 특정당이 우세인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의지가 선거 결과에 절대로 반영될 수 없다.
생각해보니 너무 욕만 한 것 같다. 축하한다. 권력을 한 번 잡고 싶었을 당선인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유권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제일 잘 리드할 것 같은 지도자를 뽑게 된다. 결과적으로 2022년 대한민국 유권자에게 가장 걸맞은 대통령을 얻게 되는 거다. 누구한테 불평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원인을 분석해봤다. 내 생각에, 여혐 이슈를 들고 온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고 만 가장 큰 이유는 방심이다. 부동산 폭등을 막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대통령, 적어도 말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한 지도자 밑에서 거의 5년을 지내다 보니 방심했다. 나도 툭하면 정치적 메세지를 던지는 키보드워리어였는데, 최근 1년, 책 낸다고 깝치면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많이 안 꺼냈다. 인스타 피드를 봐도, 대선후보들을 다루기는 했지만 짧고 얉았다.
결국 자기 반성이다. 윤석열이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이 문제였고 내가 문제다. 나는 다음 대선에도 여전히 당선될 리 없는 번호를 찍을 거다. 하지만 또 이런 불쾌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으니까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