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머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Jun 19. 2019

거울을 보자

 _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확실히 에세이를 잘 쓴다. 철학자는 아니고, 좋은 문학가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사람들도 카뮈의 표현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전반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을 꼽아 보자.


카뮈는 문제를 툭 던지고 시작한다. 인생의 가치가 있는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물어본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경험할 말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이다.


와 좋다. 역시 카뮈는 첫문장에 강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을 몇 개 나열한다. 첫 번째는 자살. 의미 없으니 끝낸다는 거다. 하지만, 부조리한 인생을 끝내면 그냥 문제를 없애는 것이지,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나마나 한 소리긴 하다.) 두 번째는 이성이다.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세계와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이며, 명료함에 대한 갈망이다. 인간의 처지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이 문장 역시 좋다. 세 번째는 종교다. 종교로 해결하려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나 다름 없다고 혹평한다. 부조리를 신으로 떠받드는 태도는 표면적인 겸손이자 자기 위안뿐이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인간적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는 그것을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치'라고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부조리는 신이 되고 (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몰이해는 모든 것을 밝혀주는 존재가 된다. 그런 추론은 논리적으로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비약이라 부를 수 있다.


이렇게 셋 다 비판하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한다. 일단 삶에서 의미는 찾을 수 없다.


나는 이 세계가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며 지금 나로서는 그것을 인식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조건을 벗어나는 의미가 존재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 손에 만져지는 것, 나에게 저항해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


한계를 명확히 한다. 거짓말도 하지 않고 왜곡하지도 않는다. 아래 문장은 더 멋지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들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나갈 것인가?


카뮈는 도망치지 않고 맞서겠다고 한다. 의미 없는 삶에 어떻게 맞서느냐. 반항이다.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그만큼 더 훌륭히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리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일이다. 에우리디케와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만 죽는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삶의 부조리,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그대로 바라보고 대응한다는 의미다.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 그리고 정면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현실의 비인간적인 면 때문에 바로 인간이 더욱 위대해지는 법인데 ... 그러나 이 짐은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회의적 형이상학이 포기의 도덕과 손잡는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카뮈의 대답은 약간 의외다.


...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천한 일인지 구역질 나는 일인지, 혹은 우아한 것인지 유감스런 것인지를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결정적으로 가치의 판단은 폐기되고 사실의 판단만 남는다. 나는 오로지 내가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만 결론을 이끌어낼 뿐 그 어떤 가설도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많이 사는 것은 단순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대립한다.


그들은, 단순히 경험의 양으로써 모든 기록을 깨뜨리고 (나는 일부러 이 스포츠 용어를 사용한다.) 이로써 자신의 고유한 도덕을 획득하게 되는 일상생활의 모험가를 우리로 하여금 상상케 해준다. ... 모든 기록을 깨뜨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능한 한 자주 현실세계와 부딪친다는 것이다. 오로지 그뿐이다. 언어의 희롱이 아니고서야 이것이 어떻게 모순 없이 가능해질 수 있겠는가?  ...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가능한 한 많이 사는 것이다.


많이 사는 방법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형식이나 규칙을 말할 수는 없다. 대신에 예를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합리성이 결여된 이런 세계 속에서 어떤 규칙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에게 유익하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결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들 속에서 살아 숨쉬며 전개되는 진리다. 따라서 부조리의 인간이 추론 끝에 찾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윤리적 규칙들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들과 살아 있는 숨결이다.


별 거 아닌 말도 참 멋지게 한다. 이어서 네 가지를 예로 드는데, 하나는 바람둥이로 유명한 돈후안이다. 모든 여성을 만날 때, 열정을 다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한다. 둘은 연극 배우다. 금방 소멸해버릴 영광을 위해 몸을 불사른다. 그들은 연극이 곧 끝날 것을 알고 연기한다. 셋은 정복자다. 단순히 영토를 정복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신에게 항거하거나,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렇게 셋을 먼저 소개하지만, 그대로 따르라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슬기롭다는 말이, 갖지도 않은 것에 대한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슬기로운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들 중 한 사람, 이를 테면 정신에 있어서의 정복자, 인식에 있어서의 돈 후안, 지성에 있어서의 배우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당부하고 네번째, 창조자를 소개한다. 창조자는 작가를 말한다.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한 번 더 사는 것이다. 작품에도 명철한 사고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작품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예술작품은 자신의 드라마를 구체화하여 나타내 보이지만 그것을 오직 간접적으로 입증할 따름이다. 부조리한 작품은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의식하는 예술가와, 구체적인 것은 그냥 그것 자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그러한 예술을 요구한다. 작품은 어떤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위안도 될 수 없다. ...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미학적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언제나 인간적인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작품은 본질적으로 '더 적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지프 신화'를 이야기 한다. 앞에서 서술한 네 가지 삶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앞부분은 너무 어려워서 잘 기억이 안난다.) 강력한 이야기다.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은 쉬지 않고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 오르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들이 허무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삶의 부조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매일 출근해서 해야할 일들을 처리하고, 마감을 맞추고, 보고서를 올리면, 돌은 다시 굴러떨어지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때의 태도, 돌을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제촉하는 시지프의 태도에 카뮈는 주목한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이루어진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와, 이렇게 무의미한 삶이라니. 무서울 정도로 허탈하다. 고통스럽지만, 운명을 직시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보지 못할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도 강하다.


아침에 출근 전 양치하며 거울을 보자. 출근하고 퇴근하며 돌을 굴리는 시지프를 볼 수 있다.



★★★아 진짜 어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는 싸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