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서브컬처
DDP에서 열린 #울트라백화점 에 구경갔다. 사실 미니북을 건네러 간거였는데, 암튼 놀러간 것도 사실이다. 처음 참여에 대한 제안을 받고 기획안을 봤을 때부터 기대가 많았다.
서브컬처를 주제로 전시를 한다고? 그것도 유료로?
2만원에 가까운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올까. 내 일도 아니면서 걱정이 앞섰다. 사실 내 일도 비슷하기 때문에 걱정이 더 많이 된다. 회전문서재라는 이름의 서점도 하고 #찾아가는미니북전 은 베어에서 진행중이다.
주제의 정확한 명칭은 포스트 서브컬쳐다. 나는 포스트도 좋아하고 서브컬처도 좋아한다. 지금의 서브컬처가 더이상 과거의 서브컬처가 아니다. 새로운(후기, 다음) 서크컬처가 등장했다는 의미에서 포스트 서브컬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말이 된다.
어찌보면 취향 소비에 가장 걸맞는 주제다. 남들 다 좋아하는 거 말고. 나만 좋아하거나. 내가 특히 더 좋아하거나, 나만 알고 있는 대상. 그게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대중의 선택은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취향이 되고, 서브컬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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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면 처음 만나는 길다란 골목이 있다. 나는 여기가 제일 좋았다. 아마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그럴거라 생각한다. 음악 코너도 나오고 테스트 코너도 본격적으로 나오지만 (우리 책도 이때 등장) 그래도 처음이 제일 좋았다.
온라인 플랫폼 (인스타그램 같은) 에서 볼 수 있는 짧은 글들이 소개되는데, 그 방식이 매우매우매우 세련되다. 디자인적으로도 아주 멋지고 내용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종이를 가져가는 방식, 즉 소유와 기념으로 끝내는 게 좋았다. 인스타에서 종종 보던 메트로 매거진 @metro_kr (우리 미니북 세계관에도 한번 제안 바랍니다.) 하이프도 재미있었고, 엘르보이스 @elle_voice 는 글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여기는 여성에세이 뉴스레터인데, 아니 잠깐. 우리랑 겹치잖아. 우리는 진짜 귀여운 미니북을 매달 보내주는 구독서비스를 한다. 우리가 진짜 좋고, 여기는 별로다.
글의 길이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글은 어느 정도 분량 (이미 적지 않다)은 종이에 적어놓고 나머지는 인터넷으로 이어서 보라고 QR을 그려놓았다. 아마 스캔하면 해당 페이지가 뜨는거겠지. 그런데 내 핸드폰으로는 안된다. QR을 찍는다고 해도 원하는 페이지까지 가지 않는다. 오래된 핸드폰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디자인이 무엇보다 너무 좋았다. 텍스트 기반인데 깔끔한 고딕으로 나름의 주제를 표현해냈다. 가끔 필요하면 타이포그라피처럼 조금 자유분방하게 글자가 움직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위치가 자유롭다는 뜻) 고딕 기반으로 깔끔하고 통일성이 있게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게다가 이걸 가져가는 거다. 각자 마음에 드는 문장이 적힌 종이를 가져갈 수 있다. 이건 작은 기념품이 되고 오려서 다이어리에 붙일 수도 있다. 가져가는 종이가 많으면 이것만으로도 작은 책 정도는 된다. 너무 좋다. 여기서 한시간 넘게 놀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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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음으로 이동. 우리꺼 볼 때까지는 걸어야 한다. 다음엔 레코드 였다. 뭐 예상대로 였고, 좋았다. 주제를 기반으로 추천곡이 있는데, 이 추천을 스티커 형태로 수집하기도 하고 직접 들을 수 있게 해드셋도 준비해두었다. 몇곡 들었는데 평소 유튜브 틀어놓는거랑 다르다. 아마 음악 자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 내 앞에는 노래가 재생되고 있는 걸 보여주는 디자인 뿐이다.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집중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여러 추천 리스트가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한로로가 나와서 신뢰하기로 했다. 진짜 요즘엔 맨날 한로로만 듣는다.
그 다음에는 패션이 나왔다. 패션은 별로 관심 있는 분야는 아니다. 나는 무조건 핏이 맞는 무지(글자도 없고 로고도 없는 디자인)를 선호하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보는 브랜드(유니클로 같은) 아니면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작은 브랜드(실제로 아주 작지는 않다)가 스스로를 이렇게 정체화하는 구나. 스스로를 소개할 때 이런 문장을 쓰는구나, 하며 텍스트를 읽는 재미가 있었다.
ALAND의 소개는 감탄했다. 간단히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 솔직히 시작은 거창한 명분보다 '아까움'에 가까웠습니다. 정말 괜찮은 고집을 가진 브랜드들이 유행의 속도에 밀려 너무 쉽게 사라지는 장면을 오래 봐왔거든요. 플랫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고집이 대중과 만나는 순간을 포장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훼손되지 않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상업적 효율보다 '낯선 존재감'을 끝까지 남겨두는 것. 그게 저희가 지키려는 원칙입니다. 매장을 '잘 팔리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은 유행의 유혹은 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플랫폼은 빠르게 표준화되고 취향의 다양성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에이랜드는 주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작고 단단한 브랜드'를 위해 선반 한편을 비워두는 선택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불편하지만, 플랫폼이 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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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다음에는 독립영화로 이어졌다. 영화도 패션만큼 관심 없는 분야 중 하나다.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입이 떡 벌어지는 구성이었다. 영화에 대한 멘트가 투명 아크릴로 만들어져 있어서 하나씩 뽑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고 싶고 그걸 긴 글이 아니라 짧은 댓글을 통해서 보길 원하는 디지털 세상의 문화가 있는데, 이걸 현실 세계로, 아날로그로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손으로 만지면서 읽으니 더 재미있다. 영화 코너를 더 잘 즐기려면 실제로 해당 작품을 봐야하는데 시간대별로 단편영화를 상영하니 꼭 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그냥 넘어갔다.
그다음에는 굿즈 코너다. 지금까지 보았던 브랜드 상품 일부를 구매할 수 있다. 우리 미니북도 몇종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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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니북 전문가지만, 전시는 초보다. 서점에서 전시를 해왔고, 그때마다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며 다양한 시도 및 실험을 해왔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한계는 분명했다. 우리는 다 손으로 만든다. 분명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손으로 하는게 좀 어설퍼보인다. 기계로 찍어내고 인쇄소에서 뽑아와서 한번에 붙여버리는게 깔끔한건 사실이다.
작은 서점에서만 전시할 때는 몰랐는데, 커다란 한옥 카페 베어에서 #찾아가는미니북전 3회와 4회를 진행하며 확실히 깨달았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우리 손으로 하나하나 다 만들어서 진행하면 오밀조밀 재미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규모는 쑥쑥 자라고 있다.
처음 50종으로 시작한 찾아가는미니북전 1회가 100종, 150종으로 되었다 이번 4회는 300종이다. 내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벌써 10군데 넘는 서점, 백화점, 도서관, 문화센터, 전시기관, 공공기관에서 연락이 오고 있다. 자신의 공간에서 찾아가는미니북전을 하자는 거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커다란 아이가 되어 고민했다.
넘치는 제안에 정신을 못차리다 처음으로 시도한게 #울트라백화점 이다. 꽃기린(사과앙)이 주최측과 방법을 논의했다. 줄을 다는건 어떨까. 테이블위에 올려야 할까. 연결은 어떻게 할까. 규모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보기 편할까. 이쁠까. 안전할까. 긴밀하게 연락하며 의견을 교환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안이었고, 최종적으로 울트라백화점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고안해내고 가시화했다. 그래서 우리도 결과물을 못봤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멋질까. 기대를 잔뜩하고 갔다.
공간부터 마음에 들었다. 텍스트 에비뉴에 들어서서 오른쪽 공간으로 빠지면 큰책과 작은 책이 있는 공간이 있는데 적당히 섞여있지 않고 미니북이 벽을 따라 빙 둘러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고 세련되기 때문에 조명은 부분부분 강했다. 가지런하게 놓은 미니북, 평행하게 배치된, 마찬가지로 가지런하게 붙인 설명서. 미니북과 테이블을 연결한 선까지. 너무 정갈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붙이지 않으면 미니북은 날아다닌다. 제 위치를 잃고 섞일 위험이 매우 높은게 미니북인데, 이렇게 정위치를 표시해놓고 자석으로 붙이니, 다 읽고 나면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커버키링에 딱 맞춰 씌운 미니북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크기가 맞지 않아서 파우치에 넣었다. 그래서 꺼내기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만큼 더 작고 귀여우니 파우치에 든 아주 작은 미니북도 독자들이 마음껏 꺼내보면 좋겠다.
우리에 대한 설명도 벽에 멋지게 적혀 있었는데, 이쁘게 붙이니까 더 그럴듯해 보였다. 처음 울트라백화점에서 우리를 설명하는 문구를 적어달라고 했을 때는, 나는 흥분해서 날뛰었다. 원래 자만심으로 가득찬 자아는 소개할 때마다 과장된 장문을 쏟아내는데, 이때는 더 심했다. 그 이유는 전시 주제, 포스트 서브컬쳐 때문이다. 안 그래도 스스로를 포스트 독립출판이라고 소개하던 비대한 자아는, 스스로를 전시의 주인공으로 착각했다(원래 착각하며 산다). 그래서 쏟아낸 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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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뛰는 날것의 초안�
�1. 우리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작은 책을 만드는 독립출판사 <사적인사과지적인수박> 입니다. 과일을 먹으며 독서모임을 했어요. 이름도 그때 지었습니다. 글쓰기 모임으로 발전하고 자연스럽게 출판사가 되었어요. 큰 책을 여러 권 내고 책이 계속 얇아지고 작아지다 이제는 급기야 한손에 쏙 들어오는 미니북을 만듭니다. 작은 책을 판매하는 독립서점 <회전문서재>도 운영하고 있구요. 전세계 미니북을 모아서 전시하고 자랑하고 판매하는 <찾아가는미니북전>을 매해 개최하고 있습니다. 뭘 많이 합니다.
매월 미니북 2권을 보내는 <꼬깜북 구독서비스>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월 신작을 만들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압박감에 어디 도망이라고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돈은 받았고, 이제 책을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돌파구는 없기에, 오늘도 울면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영감은 바닥났고, 밑천도 거의 다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울트라 백화점에서는 멋지고 귀여운 모습만 보여줄 예정입니다.
�2. 우리가 만드는 미니북을 소개합니다.
저희가 만드는 미니북을 소개하려면, 먼저 독립출판을 이야기해야겠네요.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책 말고,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만드는 책을 독립출판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서브컬처지요. 누구나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이는 자엽스럽게 독립출판의 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서브컬쳐가 유행이 되면 그걸 계속 서브컬처라 부를 수 있을까요? 비주류가 많아지면 비가 떨어집니다. 독립출판이 고도화되면 기성출판과의 경계가 희미해져요. 어떤 독립출판은 기성출판 같고, 어느 기성출판은 꼭 독립출판 같습니다. 이제 울트라 백화점에서 포스트 서브컬쳐를 소개합니다. 독립출판의 다음 세대! 포스트 독립출판! 바로 미니북입니다. 지금 약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미니북은 그냥 작은 거아닌가요?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겨우 '크기가 작다'는 사실, 형식적인 제한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놀랍고 귀엽습니다. 겨우 3000자, 종이로 치면 A4용지 한장 정도. 그림과 사진으로 치면 서른장. 겨우 이정도면 책이 하나 나옵니다. 누구나,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미니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래 좋아했던 것들, 기준 밖에서 상상했던 장면, 혹은 아주 이상하고 어설픈 모습도 미니북이 됩니다.
�3.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귀여운 걸 나 혼자만 할 수 없다! 는 마음으로 미니북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꼬감단>이라는 이름으로 워크샵을 하고 함께 책을 만듭니다. 진짜 뭐를 많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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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을 읽은 꽃기린(사과앙)은 코웃음을 쳤고, 글을 간단하게 줄였다. 울트라백화점에서는 그렇게 받은 글을 다시 한번 정돈했고 그게 결과적으로 벽에 붙은 글이다. 내 놀이터라고 생각하고 마구 써내려간 글이 그대로 실리지 않은 건 안타깝지만,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이게 더 낫다. 결과적으로 매우 만족한다. 글도 전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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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뿐만 아니라 텍스트 에비뉴 전체가 좋았다. 출판사를 정말 잘 소개하려고, 관람객에게 커다란 기억을 심어주려고 노력한 티가 났다. 우리 말고도 독립출판 작가 #더쿠 전시도 있었는데, 이 부스가 백미였다. 더쿠 작가가 이 전시를 기획한 대표의 숨겨진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성스럽게 멋지게 표현해냈다. 벽 하나를 할애해서 책 한권을 강조했는데, 이런 전시라면 작가들이 돈가방을 싸들고 찾아와서 내 책도 전시해달라고 요청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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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꽤 즐거운 전시였다. 관심 있는 부분을 찾아 읽고 수집하고 기념할 수 있다. 온갖 서브컬처들이 모여있어서, 내 취향이 조금 서브다? 하면 와서 만족할 거다. 서브컬처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이 2가지 있다. 하나는 내 분야만 잘 안다는 거. 다른 분야의 인디 브랜드는 잘 모를 거다. 다른 하나는, 일단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분야에서도 서브컬처에 관심을 갖기 쉽다는 거다. 인디음악을 듣는 사람은 인디영화에도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긴다(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런게 비주류 감성인 듯하다.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요즘 머니그라피의 #B주류초대석 너무 재미있다. 김민경 편집자 진짜 너무 좋다 진짜. 한로로와 함께 요즘 내 최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