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May 01. 2019

여행

여행싫어


남들이 다 그렇듯,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많이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직장인이 되고나니 (얼굴의 기름처럼) 매일매일 시간이 샘솟는 것이 아니었다. 눈치를 봐가며 겨우겨우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자, 나는 여행을 안 가기 시작했다.


휴가는 무조건 수요일이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게 최고다. 어딜 갈 필요도 없고, 보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지만, 전부 책과 PC 안에 있다. 어딜 간다고 하면, 이쁜* CAFE 정도?


김어준은, 이십대에 가고 싶은 장소가 있어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충분히 다닌 이후에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내가 그러한 깨달음이 있어서 여행을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좋아서, 딱히 어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쁘다 : 2016년 1월 1일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여행 욕망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은 어디에서 왔을까. 내 안에서 시작되었을까.


사실 마음은 이중간첩으로 당대의 지배적인 신화의 지시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는 권유 자체가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것은 19세기 낭만주의 신화와 20세기 소비자주의 신화의 결합을 통해서였다.
 _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우리는 100년 전에도 여행을 하고 싶었을까. 1000년 전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새로운 경험이 어떻게 나의 시야를 넓히고 내 인생을 바꾸었는가.” 하는 낭만주의적 신화를 되풀이해서 듣는다. 소비지상주의는 우리에게 행복해지려면 가능한 한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_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여행 좋아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여행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예능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은 「내 방 안내서」. 혜민 스님이 네덜란드 생활을 즐기는 내용이다. 예능을 좀 본다 하는 독자들을 바로 느꼈겠지만, 그렇다. 재미없다. 혜민 스님이 네덜란드에서 홍등가를 방문한다거나, 마리화나*를 핀다는 파격적인 장면... 없다. 그 노잼* 속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재래시장이다. 혜민 스님이 파프리카, 브로콜리 같은 채소를 하나하나 들어보면서 이거는 한국보다 싸네, 비싸네 하는 장면이었다.


마리화나 : cafe 와 달리 coffee shop 은 마리화나를 판매한다. 다만 한국의 법은 속인주의를 택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든 불법이다.

노잼 : 재미가 없다. No 재미


너무 재미있어 보인다.


생각해보니 나는 재래시장을 좋아한다. 영국에서, 돌길 한가운데, 이른 아침에 팔던 신선한 자두, 복숭아. 중국에서, 새벽에 가야만 살 수 있는 신선한 게, 막 잡아서 걸어놓은 소고기. 미국에서, 사막 속 고속도로 주변 트럭에서 판매하는 처음 보는 큰 과일들. 다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마트 식품 코너에만 가도 정신 못 차린다. 물론 나는 사는 걸 좋아하니까, 그냥 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 못한다. 요리하는 상상을 하면서 필요한 야채나 재료, 과일 등을 사야한다.


만일 언젠가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때는 재래시장을 꼭 방문해야겠다.


유럽의 시장을 다니면 안타깝다고 느꼈던 점은 시장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주말에만 혹은 요일을 정해서 여는 시장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과 영국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곳의 상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우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였다. 자신들이 파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시장에서만 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형 마트는 인터넷 쇼핑으로 대체될 것이고, 전통시장이 먹고 즐기고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을 살 수 있는 커뮤니티 중심지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다.
 _이랑주 「살아남은 것들의 비밀」





혹시 도망?


여행을 왜 떠나고 싶은지 생각해보자. 외국으로 나가서 낯설고 새로운 기분을 맛보고 싶은 건가? 아니면 지금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 건가?


테레자는 이 모든 것을 토마시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테레자가 프라하를 떠나고 싶어 하는 보다 근본적인 또 다른 이유가 이 진실 뒤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서 그녀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이었다. …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테레자의 망명 욕구를 토마시는 죄인이 유죄 선고를 받듯 받아들였다. 그는 그 선고에 따라 얼마 후 테레자, 카레닌과 함께 스위스의 가장 큰 도시에 있게 되었다.
 _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도망치는 것도 좋다.




※ 여행에세이집 「하라는 일은 안하고」에 수록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