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May 01. 2019

말 타고 운전

「단순변심으로 인한 이별」불가합니다


학점 따랴, 취업 준비에, 해외에도 갔다 와야 하고, 남들 따는 거 다 따고, 스팩 만들어서, 운 좋게 입사했다. 숨 돌릴 틈 없이 업무 배우고 적응하다보니, 몸도 마음도 쉬지 못하는 긴장 상태다.


2~3시에 자도 괜찮았었던 것 같은데, 12시 즈음에 LED 마스크를 끼고 잠시 누워있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다. 전날 필라테스라도 한 날에는 여기저기가 아프다. 물론 기분 좋은 통증이기는 하지만.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린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너무 정신없이 빨라진 생활양식에, 영혼이 찾아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참여정부 때, 9시부터 9시까지* 알루미늄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원숭이처럼 뛰어놀아도 피곤하지 않았던 때였지만, 퇴근하고 와서는 1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역시 일은 고되고, 우리에겐 멍하니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9 to 9 : 24시간 아니다. 12시간이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언젠가는 말을 세우고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에겐 결국 영혼이 필요하고, 영혼은 인디언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나이를 먹으면서, 영혼의 인내심이 줄어드는 것 같고, 체력도 마찬가지다. 지인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술자리에서도 막차 시간이 다가오면 꾸벅꾸벅 고개를 흔든다. 한 살 더 먹는, 겨울에는 밤이 일찍 찾아온다.




운전


영혼이 평소에도 자주 나가는지, 나는 매사에 좀 느린 편이다. 돈벌이는 서른둘이 되어서 시작했고, 취미생활은 서른넷이 되어서야 재미도 결과도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 누군가에게는 안정되어 가는 시기일 수 있지만, 나는 운전을 시작한다. 도로연수를 받은 게 아니라 실내 오락기를 이용해서 연습했고, 구사일생으로 합격한 터라, 내 미래에 대해서는, 특히 수명에 대해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아무리 천사 같은 친구들이라도, 좌회전 할 때 머뭇거리는 차량에 대해서는, 그들의 분노를, 숨겨놓은 성질을 꺼내 보인다. 그리고 그 머뭇거리는 차량에는 내가 앉아 있다. 아, 이게 엑셀.. 아, 이게 브레이크.. 아직 머뭇거리는 발에는 악의가 없다.


느린 사람들에 대해 선인들은 여러 가지 처방전을 내놓았다. 다 신의 뜻이다. 느리게 봉사하고, 빠르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는 거라고. 바짝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18세기 이전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농민들이 노동자가 되고 군인이 되기 시작한 때였다. 더 빠른 생산, 더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나서는, 전문가는 성격 유형을 연구하고, 노동자는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박차를 가했다.


이제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가능해지고, 숨어서 울기만 하던 사람들도 미투를 외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느린 사람들도 스스로 위로하기 시작한다. 인사이드아웃*의 슬픔처럼,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개념들도 필요한 까닭이 있다.


 Inside Out, 2018 : 감정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 슬픔이 존재하는 이유를 너무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_한병철 「피로사회」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_한병철 「피로사회」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 한병철이 말하는 머뭇거림,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완전하게 한다. 불완전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인간적으로 좌회전 시에 머뭇거린다. 뒷차는 빵빵거린다.




※ 에세이집 「단순변심으로 인한 이별」에 수록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