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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Jul 17. 2019

이 시대의 파이터

 _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쁜 책이다. 역시 양장이 최고다. 이 다음 작품도 아주 이쁘다.



저자는 '사회역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전문가다. 왜 아픈지, 왜 병이 걸렸는지 연구하는 것이 '역학'인데, 그 원인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부분에서 찾는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고민이지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그가 사회와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역학에 헌신하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기타를 치다가 느낀 감정이 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제가 했던 활동들이 제게는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것들이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면, 의과대학 본과 1학년 겨울방학 때, 산업재해를 당한 분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지원상근을 한 적이 있는데요. 어느 날 저녁에, 제가 기타를 치면서 함게 여러 노래를 부르다가 기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고 주변 사람을 둘러봤을 때, 손가락 열 개가 온전히 있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었어요. 그때 느꼈던 묘한 낯섦 같은 거요. 또, 고무장갑을 돌돌 말아 만든 큐대로 양손 합쳐 단 두 개뿐인 손가락으로 당구 150을 치며 아무리 쳐도 50을 넘기지 못하는 저를 놀리던 순간 느끼던 그 경쾌함이나, 밤새 민주노총 신문발송 작업을 하고서 모두가 피곤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 산업재해를 당한 후 유일한 직업이 되어버린 우유배달을 하러 가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오토바이를 끌고 새벽에 나가던 그 뒷모습에서 느꼈던 삶의 끈질긴 생명력 같은 거요.


정말 좋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지루한 부분도 많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부분과 뒷부분만 읽어도 충분한 것 같다. 소방공무원, 쌍용차,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 세월호, 성소수자, 교도소 재소자 등등. 저자가 이 분야 권위자고, 워낙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서, 중요한 이슈에는 다 참여한다. 이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 하나만 소개한다.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학교 폭력을 겪었는지, 겪었을 대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조사 대상이었다.


A_ 학교 폭력 피해 경험 없음

B_ 학교 폭력 경험 후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함

C_ 학교 폭력 경험 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음

D_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라고 답변함


청소년들은 위와 같은 보기 중에서 선택했다. 일단 결과는 예상대로 C로 답변한 학생들이 가장 아팠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울증 발생 위험이 가장 높았다. 그런데 남녀를 나눠서 분석해보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여성의 경우는 D를 선택한 경우는 A를 선택한 경우와 비슷했다. 반면 남학생의 경우, D를 선택한 학생들이 가장 아팠다. C보다 더 우울증 발생 위험이 높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라고 답변한 남학생들은 학교 폭력에 노출되고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그 상처를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깝다. 폭력을 당하고 나서, 참은 것도 아니고, 그냥 넘어갔다니.. 그냥 넘어가도 아프다. 아니, 그냥 넘어가면 더 아프다. 몸은 정직하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이제는 단순히, 사회를 바꾸자,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사회가 달라지지 않는다. 데이터가 중요시되고,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데이터를 가지고 사회를 분석하는 그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들게 된 전사다. 그의 어깨가 무겁다.


★★★ 가운데 부분은 지루하지만, 꼭 읽어봐야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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