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은 일 안에서 내 일만 잘하고 어차피 마음에 맞는 친구와 어울렸을 것이기에 굳이 노할 일도, 마음 다스릴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육아를 하면서, 마음이 아무리 평화로워도
아이의 무심코 던진 '호기심'이라는 돌멩이 하나에 나의 분노가 폭발해버리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백번이다.
마치 인내력 테스트를 하려고 작정한 듯이 말이다.
세 아이를 키우며 육아가 반복될수록
"화도 내기로 마음먹어야 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대로, 화를 내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마음 다스리기의 달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감정 제어가 완벽하지는 않다. 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늘 노력한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나, 여전히 안 되는 부분은 안 된다. 이 점이 나의 지속적인 숙제다. 그러나, 분명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다. 매일매일 조금씩 감정 조절을 해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혼내는 것과 화 내는 것은 다르다.
'아이를 위해서..'
라고 말은 하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 부모는 자식을 훈계한다는 명목하에 화를 낸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때문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훈육이라고 생각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분노의 상황이었음을 자각할 때가 있다.
어른의 입장에서, 어른이 정한 틀 안에서 판단하기에 훈육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아이의 상황이 맞는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혼을 내려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온전한 부모와 자녀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 어려서는 부모를 두려워하며 말을 듣는 척할지 몰라도 어느정도 성숙하고 자신만의 사고가 확고해지는 사춘기 즈음부터 감정의 골이 깊어져 엇나가버릴 것이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노하기를 더디하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앞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며 마음의 여유마저 생긴다. 어린 아이라도 말귀 다 알아듣고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 부모의 감정이 격하면 아이도 같이 격해진다. 부모가 톤다운된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하면, 아이도 그 감정이 전달되어 이내 부모의 말을 수긍한다.
이 원리는 비단 육아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행동이나 말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얻지만 제 성질을 다스리지 못 하는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상하관계로 사람이 있을지언정 그의 곁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하니, 마음 다스리기에 더욱 부지런히 힘쓰고 애써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