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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시시 Dec 11. 2020

케이크.. 사 올까?

벌써 아홉 번째

2011년 12월 10일,

지금으로부터 9년 전..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평소와 비교가 안 되게 엄청난 양의 눈보라가 치던 날이다


눈이 어찌나 많이 내리는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마치 세찬 장대비가 눈이 되어 내리는 것 같다

바람까지 거세게 불어 점입가경이다

걷기 위해 애써 눈을 떠 앞을 보았지만 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리는 눈발이 양이 많아 피부에 닿아도 잘 녹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쌓여갔다

차갑다, 그러나 마음만은 정말 따뜻한 특별한 날이었다


우리 둘은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였고

축하해주러   앞에서 혼인서약을 했다

이런 날 결혼하면 잘 산다더라~

정말 그럴까?

먼 길 오느라 다들 불편하셨을 텐데 감사한 마음으로 정말 잘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이 엄청난 눈은 우리의 앞길을 축하해주는 선물 같았다. 앞으로 매년 이 날이 돌아오면 생각나겠지?

둘이 하나 된 이 특별한 날을..?

이 엄청난 날씨에 연착된 기차를 타고 우리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고생한 하객들 앞에 섰던 우리의 모습을..

식이 끝난 , 정신없이 피로연을 마치고 시댁 식구, 친지들 모인 곳에서 같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인사하던  날을..  눈발 날리는 길을 걸으며 친정 식구들이 자리 잡아 기다리던  식당을 향해, 남편이  남자친구와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가던  순간을..


결혼전 스튜디오 촬영사진


매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12월 10일..

바로 오늘을 맞이하게 될까?




허니문 베이비를 가진 나는

결혼 후 줄곧 전업주부의 길을 걸어왔다.

해마다 아이와 함께 정신없는 결혼기념일을 맞이했고 또 그렇게 보냈다

그렇게 9년.

얼마 전부터 남편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남편은 인터넷 판매 일을 하고 있는데 코로나 영향권에 들 것 같지 않던 이 일도 타격을 받아 휘청거리기를 7개월째..

납품받던 곳이 미국인데, 코로나 초창기..  미국 공장이 문을 닫아 물건 공급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우리는 살 길을 찾아왔지만 아직도 헤매는 중이다


세 아이를 기관에 맡기고 일을 할 생각이었으나,

그보다는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는 남편의 말에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남편은 종목을 바꿔 새로운 물건 공급처를 뚫었다

남편이 물건을 주문하면 그 물건의 상세페이지를 만들어 네이버에 올리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생전 해보지도 않던.. 컴퓨터 앞에 앉아 포토샵을 공부하며 물건의 상세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3달쯤 되니 이제 웬만한 상세페이지는 만들 수 있다

아직 디테일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최소한으로는 만들 수 있게 되었.

역시....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남편이 말했다,

오늘은 물건 배송 템플릿 좀 만들어줘

배송 템플릿이라 함은.. 인터넷 쇼핑하다 보면 하단에 주문 시 유의사항(고객변심으로 인한 반품은 왕복 택배비 얼마 부담, 제주도 산간지방은 추가 비용 얼마 부담 등의 내용)을 말한다

새벽에 같이 기상해서 일하기로 해 놓고선 못 일어나길래 많이 피곤한가 보다.. 하고 늘 그렇듯 나 혼자 새벽에 일어나 일을 했다, 사실 남편의 일을 돕는다고 하지만 난 그 새벽시간 아니고선 일을 할 시간이 없다. 낮엔 육아로 바쁘기에.

팔순잔치 이후로 체력이 달려 일어나기 너무 힘들었다. 그렇지만 일어났다, 그 시간은 내가 유일하게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니까

남편의 주문대로 배송 템플릿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몇 시간 작업을 못하기에 3달이 되었어도 여전히 포토샵 초보인 나는, 2시간을 투자해 열심히 배송 템플릿을 만들었다. 그렇게 아침 7시가 되었다.

여봉, 만들었어!

어, 알았어, 고생했어~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이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핸드폰을 내민다

타사 상세페이지 배송 템플릿이다

????

????

이런 거 있다구? 이렇게 하라구?!

남편이 멋쩍은 듯 웃는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이거 봤어! 근데 난 여기꺼보단 이게 낫겠다 싶었어

그래서 이렇게 작업한 거야..

이럴 거면 미리 원하는 바를 말해 주던가!

깨울 때 일어나서 바로바로 말을 하던가!


치.. 마음대로, 알아서 하라고 해 놓구선..

새벽에.. 그것도 2시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 인대!

내 유일한 자유시간을 확보해 들인 이 귀한 시간에 대한 대가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남편은.. 딴에는 기분 안 상하게 하려고 조심히 내 눈앞에 내민 핸드폰 화면이었으나.. 나의 화는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분노라고 하기보단..

허무했다..

그래, 사람이 생각하는 게 다르니..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남편은 출근했다


하루 종일 기운이 없다,

그냥 나의 이 자리를,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루라도 지금의 나를 벗어나 자유로운 나로 살고 싶었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다 족쇄처럼 느껴지는 하루였다

마치 백미정의 '하루만 엄마로 살지 않을 수 있다면'과 같이.. 하루만 엄마로, 아내로 살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남편은 퇴근을 했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갑자기 첫째 아이가 묻는다

그런데..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 12월..10... 며칠이더라

여보! 나야 원래 잘 까먹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ㅠㅠ

미안.. 오늘(10일)이야? 케이크.. 사 올까?

됐어, 다 지났는데 뭘, 사놓은 떡 있어

그거 먹어야 돼..


난 원래 뭐든 잘 까먹는다

남편은 기억도 잘하고 잘 챙겨준다. 잘 챙긴다는 게 값비싼 돈을 들여 뭔가를 사고 이벤트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한마디 마음 한 번을 더 쏟는다는 뜻이다. 결혼 다음 해에 결혼기념일을 잊은 내게, 자기가 매년 챙기겠노라 약속을 했었다

. . .


남편도 어지간히 힘든가 보다

요즘 부쩍 뭔가를 놓치고 잊는다

.  . .


이렇게 우리는

9번째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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