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있는 용기
때로는 멈추는데도 용기가 필요해
마흔셋, 시험관 시술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났다. 처음 시술 시작했을 때는 마흔 살 되기 전에 엄마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은 지났고 나는 아직도 엄마가 아니었다.
40대가 되자 배아 상태가 예전만 못해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간혹 40대 중반에 임신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내 이야기처럼 와닿진 않았다. 로또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잠시 부럽지만 내게도 같은 일이 생길 거라 기대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래도 로또를 사는 이유는 극히 적은 확률이지만 어쩌면 나도 횡재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사는 것이 아닐까? 내게는 시험관 시술은 로또와 같았다. ‘다시는 안 한다!’라며 병원문을 박차고 나와도 몸에 힘이 돌면 나도 모르게 병원 예약한다.
‘혹시 알아? 이번에는 될지.’
로또 발표일까지 희망으로 기분 좋게 보내듯 시술하는 동안 미래의 아기를 상상하며 기분 좋게 보낸다. 그리고 실패하면 한동안 우울하고 다시 도전하고, 이 정도면 중독이 아닌가?
아예 가능성이 없으면 마음 정리가 쉬우련만. 단 1%의 가능성이라도 놓을 수 없으니 자꾸만 미련을 두고 반복한다.
시험관 시술 카페에서 어떤 의사 선생님이 ‘생리 한 방울이라도 나오면 희망은 있다’라고 시술을 독려하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그 한 방울이 마를 때까지 시험관을 해야 한다니 한숨이 나온다.
차라리 누군가 미래를 알려주면 좋겠다. 간밤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번 생엔 손주를 못 볼 것 같아.”라고 말해주시던가 점집에서 카리스마 넘치게 “됐어! 그만해. 어차피 안 돼.”라고 말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멈출 수 있을까? 단 1%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그만둘까 말까 갈팡질팡할 때였다. 하드를 정리하며 오랜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버려진 낡은 스웨터에 다 뜯긴 운동화, 더러운 바지를 입고 있고 까맣게 탄 얼굴에 눈만 반짝이는 내 모습. 오래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멜 기력이 없던 나는 단벌 신사로 산티아고 길을 완주했다. 한 벌의 옷과 여분의 속옷 한 개, 양말 한 켤레, 비누 반쪽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놀랍게도 한 달 반 동안 그것만으로도 잘 지냈다.
사진을 보니 그때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래, 나는 가볍게 살아야 해.’
등에 진 배낭의 무게는 삶의 무게 같다. 너무 무거우면 한 걸음도 걷지 못하거나 얼마 가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버리듯 내 삶에도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 매야 한다. 그러자 고민했던 시술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그래, 그만하자.’
인생에서 4년이면 충분하다. 이 순간 없는 자녀를 위해 사는 것보단 내 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인연이 닿으면 엄마가 될 수도 있겠지. 꼭 생물학적으로만 부모가 될 필요 있을까? 마음으로 아니면 사회적으로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멈출 용기가 생겼다. 두려움과 미련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이 떠올랐다. 아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내 나이 마흔셋, 이제는 아이 없는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