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연우재 8/1-9/3 (월 휴관)
전시를 준비할 때는 항상 전시가 펼쳐질 공간을 머릿속에 미리 그려보게 됩니다. 연우재라는 고즈넉한 한옥 공간과 어울리는 가장 자연스럽고 나다운 작품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마음속 작품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8월 연우재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평소 캔버스 페인팅을 주로 하지만, 저는 인상적인 날의 일기를 디지털 추상으로 가볍게 기록하는 것 또한 즐겨합니다. 캔버스에는 일정 기간 생각하고 살아가며 응축된 에너지를 한 번에 쏟아내는 편이라 작업 사이사이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반면, 디지털 추상 작업은 그날그날 하루를 마무리하며 끼적이는 일기이자 드로잉이기 때문에 큰 각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켜켜이 쌓인 추상 일기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단번에 소환시켜 저의 현재를 점검하고 바로 서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에게 쉼이자 다짐이기도 한 이 <추상 일기>가 바로 편안하게 사색할 수 있는 공간, 연우재의 커피 향과 가장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 연우재에서 8월 한 달간 펼쳐질 저의 다섯 번째 개인전 <추상 일기>를 통해 관객 여러분의 2023년 여름 한 조각이 특별한 쉼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멈춰 세울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도시도,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도, 손끝에 닿은 술잔 하나도, 그 무엇도 시간을 거슬러 영원히 존재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138억 년을 팽창해 온 광대한 우주의 시간과 비교하면, 우리가 때때로 지루하게 날려버리기도 하는 하루 24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기쁨도 절망도 다짐도, 그 짧은 하루 안에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연기처럼 흩어진다. 축제처럼 피어나는 행복과 와인 한 잔의 몽글몽글함, 무너져내리는 슬픔과 초행길의 설렘은, 이내 사라지고 마는 하루라는 순간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추상 일기는 순간과도 같은 어느 하루를 가장 순간답게 담아내는 나의 기록 방식이다. 그 어떤 자세한 말도, 유려하게 표현한 글도, 추상으로 표현한 이 한 장의 그림보다 나를 그날의 감정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게 하는 것은 없다. 순간의 본질과 가장 닮은 모습으로, 그렇게 또 하루를 기록한다.
순간은 멈추지 않으므로. 멈춰 있는 것은 순간이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