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 Jo Nov 01. 2024

전부 버릴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지금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어떠한 지연도 없이 그대로 옮기고 싶어서, 나는 캔버스에 물감을 그대로 던진다. 그렇다고 액션 페인팅처럼 던지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간혹 교과서에서 배운 예술사조 안에 아직 살아있는 작가들을 그대로 끼워 넣어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작업 방향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으니, 현재까지 발표된 작품의 형식만으로 작가를 분류하는 건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가끔씩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말 피곤해지는데, 어차피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마음보다는 자기가 아는 지식 범위 안에 나를 완벽히 끼워 맞추려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천성이 외향적이라 모임 자리를 정말 좋아하는 편이지만, 생각하기 편하게 나를 분류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이 자리에 있으면 되도록 피하고 싶다. 그보다는 차라리 과학이나 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서로의 관계에 있어 발전적인 일일 것이다.


 어쨌든 내 경우, 흰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떠오르는 상이나 색이 분명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주조색이 있다면, 배경 칠을 먼저 한 후 며칠 뒤에 다시 캔버스 앞에 선다. 그 후에는 손에 잡히는 컬러 중 주조색과 어울리는, 혹은 대비가 잘 되는 몇 가지 컬러를 그대로 덩어리째 던진다. 숲을 보는 것은 일단 거기까지다. 그 뒤에는 덤불 같은 물감 덩어리들 가까이 바짝 붙어 없는 길을 만들어 내듯이 길을 찾는다. 이쪽으로 빼고, 저쪽으로 치우고, 납작하게 누르고, 넓게 펼치면서 때로는 물을 붓기도 하고, 아예 닦아 내기도 한다. 작은 마당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고, 수풀을 심고, 나뭇가지를 치듯 모양을 잡아가는 것이다.

 그 중간중간 뒤로 나와 다시 숲의 모양을 관찰하면서, 이 모습이 맞는지 다시 확인한다. 맞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최초에 떠올렸던 상 그대로를 정확히 옮겼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스치는 내 생각과 감정, 기억, 영감 같은 것들이 조화롭게 반영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이미 시작한 여정 중 길을 잃으면, 완전히 망칠 수도 있다. 못해도 10만 원, 20만 원은 하는 대형 캔버스와, 비슷한 값의 물감 값을 다 날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길을 잃는 지름길은 단순하다. 무언가를 구태여 강조하고 설명하려고 하면, 말 그대로 길을 잃고 미궁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크릴 물감이 마르기 전에 한 번의 호흡으로 끝내야 하는 나의 작업 특성상, 한번 페이스를 잃으면 완성하기 정말 쉽지 않다. 두세 시간 정도 완전히 집중해야 하니, 마라톤과 비슷하다. 

 나 자신과 완벽히 합의되지 않은 상태로 그림을 망치기 싫어 억지로 보기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하다 보면, 결국 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그림이 된다. 그림 속에 나타난 형태가 구체적인지, 추상적인지에 따라 모호한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오롯이 드러나지 않으면, 또는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의 본질이 담기지 않으면 그 그림은 모호한 그림이 된다. 이는 사실 어떤 예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음악 또한, 장르나 조성을 떠나 자기 자신이 온전히 담긴, 또는 듣는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투영할 수 있는 곡이어야 오래도록 사랑받지 않는가. 

 내 경우에도 잘 된 작품을 꼽는 기준은 두 가지이다. 첫째, ‘심미적으로 만족스러운가?’ 둘째, ‘관객마다 조금씩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는가?’ 이 두 가지에 완벽히 부합하는 작품이 ‘The Soul’인데, 이 작품을 전시할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 생생히 기억난다. 무려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이 작품은, 아, 나도 모르게 정말 끌린다.”

 “그림이 너무 야한데?”

 “이 그림은 밝고 경쾌한 것 같아요!”

 “뭔가 어두운 기운이 느껴져요. 슬퍼요.”



 표출하고 싶은 것은 분명한데 여건이 되지 않았던 시절, 답답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던 작품이라서 그림 상단을 보면 무언가를 입으로 쏟아내는 사람의 두상이 어렴풋이 보인다. 같은 그림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어두움을,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어떤 사람은 섹슈얼한 이미지를 보았다. 관객들 각자의 현재 상황과 과거의 경험에 따라 같은 그림을 보아도 눈길과 생각이 머무는 부분이 달라지는 것이다. 관객들 각자가 발견한 특정한 ‘상’은 그들의 생각 속에서 입체적인 현실이 된다.

 이와 같이, 역사의 한 장면을 담은 사실화가 아닌 이상 그림 감상에 있어 정답이란 없다. 자신이 쓴 대사를 배우로 하여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연기해 주기를 바라는 시나리오 작가가 있는 반면, 배우가 재해석한 캐릭터에 따라 애드리브를 허용하는 작가가 있다. 나를 시나리오 작가에 대입하자면, 후자에 속한다. 

 현대미술은 관객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아주 느리고 거대한 연극이 아닐까 싶다. 전시가 계속 이어지는 한, 작가가 죽고 난 이후에도 작품으로 인한 공명과 교류가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분야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그렇기에, 내가 관객의 입장에 섰을 때도 권위자들의 교과서적인 해석이 난무하는 어떤 유명 작품보다는 차라리 해당 작가의 이름 없는 습작이 개인적으로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 같다. 

 누군가의 개입 없이, 마음의 대화가 절로 일어나는 그림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같은 작가의 작품 안에서도 유독 나에게 닿아 오는 작품이 있다면, 내 안의 어떤 것이 그토록 그 그림과 나를 끈끈하게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 작은 발견이 나의 삶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아직 모르니 말이다. 

 나도 잘 모르던 나를 한 조각 발견하는 기쁨. 그것이 우리가 각자의 삶에 예술을 들여놓는 이유여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 부와 교양을 과시하기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자신을 투영하고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매개체가 되기를. 당신의 삶에도 예술이 그렇게 쓸모 있는 존재로 숨 쉬고 있기를 기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8월 조이조 개인전 ‘추상 일기’를 준비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