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 Jo May 05. 2024

두려움과 악연의 쓸모

두려움을 파고들어 가면


 운동 신경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서 대표로 뛸 일은 거의 없었지만, 학창 시절 달리기 계주를 하던 순간이 종종 떠오른다. 다음 선수에게 얼른 바통을 넘겨 버리고 편하게 쉬고 싶은데,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도무지 도착점에 가까워지지 않던 그 순간, 그 장면들.

 그 괴로움의 순간은 때때로 잠들기 전에도 재현된다. 의식의 바통을 무의식에 넘기고 이제 그만 스위치를 끄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불안감이 엄습하고 신경이 예민해지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초 단위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언제 들숨을 쉬고, 언제 날숨을 쉴지 결정하는 것조차 버거운 기분이다. 잠에 들어야 이 불쾌한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한껏 손을 뻗어 바통을 내밀어도 다음 주자의 손끝에 도무지 닿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나를 다음 단계로 수월하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이다.

 ‘처음에 뛰라고 할 때 완강히 거절할걸, 나 때문에 지는 거 아니야?’

 ‘억울해도 조용히 참을걸, 괜히 공론화해서 엉뚱하게 인신공격만 당하고 묻히는 것 아닐까?’

 이런 막연한 두려움은 시작하기 전보다 이미 전선에 뛰어든 후 더욱 거세게 밀려든다. 이는 사실, 이미 출발선을 떠나 뛰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바람의 저항과도 같다.

 이 두려움의 실체를 파고 파고 또 파고들어가 보면, 때로 허무감이 밀려온다.


 최선을 다한 계주에서 진다고 한들, 공책 몇 권을 못 받는 것과 승리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엄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신공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다. 나보다 피해액이 작은데도 명백히 부당 해고로 인정받은 판례가 2000년도부터 수두룩한데도,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냐며 나의 스펙이나 상대 회사의 사정을 어림짐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론사에서 회사와 개인을 특정할 수 없어 뭉뚱그린 정보만 나갔기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다. 동일 직종 경력직이라는 정보 또한 제외되었기 때문에 억측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감액된 연봉 액수만 보고, '저 금액으로 왜 생활이 불가능하느냐'라며 과소비를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뉴스 댓글 창에 던지는 화살에 마음을 쓰며 굳이 과녁을 가져다 댈 필요가 있을까? 마구잡이로 던져 놓고 이내 각자의 삶에 집중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분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의 피해자로 불특정 다수의 입도마에 오르는 일도 이렇게 두렵고 피곤한데, 해석의 여지가 있는 일로 온 국민의 주목을 받는 건 얼마나 큰 중압감이 따라오는 일일까? 그들에 비하면 나의 케이스는 겨우 콩알만 한 도롱뇽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확대된 것에 불과할 텐데, 이미 공룡과 싸우는 것처럼 진이 빠진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분야를 막론한 유명인들, 특히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들으면 누군지 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내가 좋아했건 그렇지 않건, 아무렴 상관없다. 그들이 언제나 짊어지고 있는 것은, 과연 그들이 벌어들이고 있는 수익과 비례할까?


 인연에는 악연과 양연이 있다. 나의 가능성을 꺼내어 빛나게 해 준 건, 역시 좋은 인연들과 우연이었다. 이번에는 어디서도 만나보지 못한 악연과 맞부딪치며, 그동안 미처 깎이지 못했던 아주 단단하고 모난 귀퉁이가 동강나는 듯하다.

 산산조각 난 의식의 거울 속에서, 그렇게 나의 한계를 마주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과 이상 사이, 글 잇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