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 사고의 무례함을 감내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분노의 표출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인간이 운용할 수 있는 매체의 범주 안에서, 아무래도 가장 고상한 방법은 예술 작품을 통한 표출일 것이다. 여의치 않은 환경을 핑계 삼아 펜이라도 들어보기로 한다.
작금의 사태는 정말이지 견디기가 어려운데, 가장 사소한 것부터 들자면 무작위로 집어온 리투아니아산 맥주가 견디기 힘든 향취로 코와 혀를 마비시키고 있다는 현실 하나. 그것보다 조금은 중량이 있는 것을 말하자면 소중한 주말 하루를 급작스런 불청객으로 인해 망쳤다는 것. (잠깐 청한 낮잠도 이로 인한 악몽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는 테스트 단에서는 훌륭했는데 막상 실행해보니 눈 앞이 캄캄해지는 캠페인. 곧 밝아올 월요일에 이를 수습해야 할 것이다.
근 몇 년 동안은 붓도, 마이크도, 무엇도 들지 않은 채 '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돈을 벌고 있으니까'라는 자위로 온갖 핑계를 끌어다 얼기설기 덧붙이기 바빴다. 실은 이전만큼의 에너지를 끌어내기가, 또한 또 다른 불확실성에 대한 투자가 두려운 것이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들이닥치는 불안감과 공허함을 여타 직장인들이 으레 활용하는 방식의 것들로 채우려, 각종 모임과 검증되지 않은 만남으로 부자연스러운 인간관계를 수도 없이 형성하고, 찰나의 즐거움에 따른 대가를 치렀다. 비용과 감정 소모, 상처, 평가당하고 회자되는 모든 과정과 결과들, 스스로에 대한 조소, 포기의 정당화, 그리고 생각의 마비.
이 과정을 지켜본 ─10년이 넘게 굳건히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지켜나가고 있는─ 나의 동료이자 친구인 여동생은 오늘 아침 취기를 빌어 마침내 울음을 쏟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왜 이해받지 못할 곳에서 이해를 바라면서 시간과 재능을 낭비하고 있냐는 말이야!
왜 그토록, 이해받을 수 없는 곳에서 이해를 갈구하며, 결국은 이해받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예정된 절차로 실족하는지. 어째서 누가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것처럼 다가오면 모든 것을 활짝 열어 보여주고는 뻔한 괴리에 아파하는지. 왜 7년이 지난 지금도, 네 작품은 성숙하지만 너라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함께 작업했던 아르메니아 음악가의 소견에서 한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 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잘 모른다. 알면서 움직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과 같다. 동생의 말이 맞다. 존재를 증명하고 인식시키기 위한 꽤나 명확한 조건들이 좋을 뿐, 나는 여태껏,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을 붙으면, 연인이 생기면, 이걸 해 내면, 저걸 가지면, 그걸 갖추면, 사랑이 되는 줄 알았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격려해주고 인정해준다고 해도, 그건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무언가를 더 갖춰야만 하는 성격의 일도 아니다.
결국은 동일한 상태에서 뚫어 내야 한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30여 년 동안 겹겹이 쌓인 단단한 막을. 스스로를 가둔 투명한 철책을. 만져지지 않는 허들을. 어쩌면 나는 이 부분에 있어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마비가 된 손가락 끝을 온 힘을 다해 까닥, 해보려는 노력은 온전히 자력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은 이렇게, 오래 묵은 한 겹의 무력함을 찢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