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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Feb 03. 2020

옛 동독의 잿빛 휴양도시 퀼룽스본

은빛 거울 발트해 - 독일 국경의 초대 작가


2011년 11월 1일, 런던 히드로 공항의 노을을 뒤로하고 KMI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 최북단,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Mecklenburg-Vorpommern)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우선은 독일 남부 소도시에 잠시 머무른 후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도이체반(독일 철도)을 타고 10시간 이상 북단으로 향해야 목적지인 퀼룽스본(Kühlungsborn)에 닿는다. 독일 북부의 대도시인 함부르크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한참을 동쪽으로 달려 퀼룽스본의 어느 작은 간이역에 도착했다. 어둑한 역사 밖에는 예술 재단 관계자인 카타리나가 마중 나와 있었다. 무척이나 반가운 기색이었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회전교차로 갓길 위에서 짐이 가득 찬 차에 시동을 걸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연착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도이체반인 데다 국경에 인접한 지역인지라 다른 참여 작가들이 정확히 언제쯤 도착할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도 누구라도 나올 것이라 믿고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인도, 아르메니아, 이스라엘 등 전 세계 각지에서 출발하는 스케줄을 한날한시에 맞추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초대 작가들이 모두 모이기까지 사나흘 가량 소요되었고, 그 사이 먼저 도착한 몇몇은 퀼룽스본 시내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자원봉사자 마리옹,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폴린, 미국의 설치 작가 스테파니, 그리고 한국의 회화 작가로 참여한 나까지 네 명에게 주어진 행운이었다. 이 행운이 참여 작가들에게 각별하게 다가왔던 이유가 있다. 첫째로, 퀼룽스본은 옛 동독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라 호텔 직원들조차도 영어보다는 러시아어에 익숙해 무언가를 요청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가 배정받은 숙소는 가장 가까운 마트가 인적 드문 오솔길을 따라 6km를 이동해야 겨우 나오는 외딴 곳이었다. 때문에 지역을 잘 아는 누군가가 인솔해주지 않는 이상 개인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는 어려웠던 것. 그런 상황에서 재단의 직속 직원이 아닌 조합원 격에 속하는 각 호텔 관계자들이 앞장서서 이곳저곳 구경도 시켜주고, 편의를 봐주어 감사했다.



덴마크를 마주하고 있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하여 1800년 대부터 여름철 휴양 도시로 기능을 해 온 퀼룽스본은 가을과 겨울에는 궂은 날씨 덕에 인적이 드물다. 이 시기에 국제적인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비수기를 극복하기 위한 홍보의 일환이기도 했다.


처음 만난 퀼룽스본의 발트해는 매서운 바람에도 소리 없이 잔잔했다. 은빛 거울이 드리워진 바다는 낡은 건물들의 음울한 그림자를 삼키고 여름의 소란한 기억을 가져다 주려 애썼다. 어둑한 한낮이었지만 바다와 지난여름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이곳 사람들은 그가 쓸쓸하지 않도록 삼삼오오 모여 곁을 지켜주었다.


잿빛에도 온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하게 알았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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