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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Oct 25. 2020

설치작가 마찌아와의 동거

이탈리아에서 온 미모의 센 언니


아티스트 레지던시 공모를 통해 우리를 초대한 KMI 예술재단의 주도 하에, 열댓 명의 아티스트들은 둘 씩 짝이 되어 서로 다른 위치의 숙소를 배정받았다. 지역 사회 발전과 홍보를 위해 메클렌부르크 곳곳에 위치한 여러 소규모 호텔들이 숙식을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각 호텔의 재량에 따라 수용 인원이 제각각이어서, 한 곳에서 다 함께 묵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룹으로 방문한 아티스트들은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지내도록 배려해주고, 나머지는 나이와 성별에 따라 나뉘었다.


나와 룸메이트가 된 아티스트는 같은 또래의 이탈리아 설치작가 마찌아 로시였다. (지금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 이름도, 작가명도 바뀌었다.) 금발에 어울리는 짙은 레드 립스틱으로, 등장부터 강렬했던 마찌아는 시내에서 특히 동떨어져 있는 우리 숙소를 마뜩잖아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없고 구경할 거리도 없으니 영 심심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독채 펜션이 여럿 모인 별장 단지 같았던 바스토프의 숙소


우리가 배정된 숙소는 마구간이 달린 옛 시골 가옥들을 개조한 전원 단지 호텔로, 바스토프(Bastorf) 지역 내 등대가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을 보려면 반드시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해안가 동네인 퀼룽스본 시가지까지 내려가야 하는 구석진 곳이었지만, 내부 시설만큼은 깨끗하고 집기들도 정갈했다. 당시 밀라노에 거주하던 그녀로서는 패션 위크 시즌으로 북적북적하던 거리에서 인적 드문 깜깜한 시골 오솔길에 갑자기 뚝 떨어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일을 처음 방문하는 마찌아는 아무리 시골이어도 그렇지, 이 정도로 조용할 줄은 몰랐다며 연신 놀라워했다.


헤어스타일이 남다른 친구와 인사를 나누는 마찌아


자연보호 구역에 일부 걸쳐 있는 바스토프 답게, 마찌아와 주변 탐방을 나설 때마다 사람보다 훨씬 많은 동물들을 마주쳤다. 헤어스타일이 남다른 준마를 비롯, 거대한 집토끼들, 오종종한 조랑말들까지 시골 마을에서 기르는 동물 친구들의 종류는 사뭇 다양했다. 거대한 잿빛 갈매기와 매, 그 외 이름 모를 새들도 숱하게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쳐 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계절이 오기 전, 언덕 위의 숲은 조금씩 붉은 낙엽들로 소복이 메워졌고 이내 장관을 이뤘다. 가을 풍경이 좋다는 곳들을 종종 다녀보았지만, 바스토프의 빼곡한 가을 숲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원체 주요 도시에서 먼 국경 지대인 탓에 웬만한 여행 안내서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다시 찾아올 기회가 영영 없을지도 모를 두 이방인만 감상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진풍경이었다. 조금 더 자기 자랑을 해주었으면, 싶은 독일의 면면들.


바스토프의 가을 숲에 내려진 2주간의 마법


서울보다 밤이 짧은 독일 북부의 늦가을은 실내에 틀어박혀 작업을 하기에 최적이었지만 초기에는 작업실이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아 곤욕을 치렀다. 그나마 회화 작업을 하는 나는 숙소 거실에 커다란 비닐을 깔고서라도 작업이 가능했지만 설치 작가인 마찌아는 숙소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그녀는 밤마다 전화를 붙잡고 불같이 화를 냈는데, 이탈리아 말을 모르긴 해도 통화 대부분이 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찌아는 다른 전시 기회를 마다하고 이번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선택했던 것인데, 작업을 전혀 진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작업실로 쓰기에는 부적합했던 객실 내부


그녀를 위한 (고철 재료나 집기들을 맘껏 부술 수 있는) 작업실은 결국 한 달 뒤 프로그램 총괄 디렉터가 아닌 우리가 묵은 호텔 관계자들이 나서서 마련해주었다. 나중에는 협회가 해당 디렉터를 고소할 정도로, 프로그램 운영 전반에는 상당한 허점이 있었다. 참여 작가 중 한 명인 아일랜드 사진작가 케이트의 의견을 빌자면, 이번 프로그램의 디렉터는 작품 보는 눈 외에는 업무적인 장점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문제는 다른 작가들이나 지역 재단 관계자들의 의견도 대부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족한 환경을 지적하고 개선해달라 직접적으로 요구했던 나와 마찌아에게 ‘Childish’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던 디렉터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기 힘들었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연극과 행위예술을 하던 아티스트였고, 이탈리아어를 포함한 3개 국어에 능통한 인재였지만 그 모든 멋진 이력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달이 넘는 레지던시 기간 동안 단 하나의 제대로 된 작업을 선보일 수 있었던 마찌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실내공간에서 작품을 전시했지만 설치작가들의 경우 별도의 외부 전시 공간을 부여받지 못해 바닷가나 숲 속에서 작업을 진행한 후 기록물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개개인이 자신의 역량과 성과를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 올바른 프로세스와 시스템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회사 조직에만 국한된 전제는 아니다.


발트해와 맞닿은 고건물에서 진행되었던 레지던트 아티스트 단체전. 나는 유일한 회화 작가로 참여했다.


함께 지낸 두 달 동안 동고동락하며, 마찌아로부터 작업적으로나 생활면으로 이런저런 소소한 팁들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 기반의 젊은 작가들이 어떻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 또 평범한 이탈리아 청년의 자취 레시피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오랜 연애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등, 여고동창끼리의 수다처럼 이어졌던 20대의 고민들은 이제 전혀 다른 형질로 기억의 책방에 차곡차곡 쌓였다.



지난 10년이 그랬듯, 앞으로의 10년 동안에도 몇 번의 값진 기회들은 여전히 다가올 것이고, 내 몫으로 남은 것은 체급에 맞는 중량을 선택하는 일이다.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고서도 거뜬히 짊어지고 있을 수 있는 기회는 무엇일까. 곧 다가올 폭설과 폭풍우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날의 우리가 주저 없이 선택했던 것들을, 다시 선택하지 못할 이유는 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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