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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Dec 28. 2020

외눈 고양이와 괴짜 요리사

그리고 독일 시골마을의 크리스마스 마켓



베를린보다도 덴마크가 가까운 독일 최북단 시골 마을의 겨울은 하루 걸러 내리는 함박눈 속에 폭 파묻혀 고요했다. 숙소 간의 거리가 먼 관계로 특별한 전시나 교류 행사가 없는 날은 다른 작가들을 만나거나 바깥바람을 쐴 일이 별로 없었는데, 가끔씩 나와 마찌아의 숙소에 불쑥 찾아와 제 집인양 누워있다 가는 손님이 있었다. 바로 체다 치즈색 코트를 입은 외눈 고양이 녀석이었다.  



아무때나 불쑥 찾아와 늘어지게 잠을 자던 외눈 고양이 친구



아무도 이름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호텔 객실 곳곳을 쏘다니며 따뜻한 겨울을 나고 있는 운 좋은 친구였다. 외눈 고양이는 우리가 아침과 저녁을 해결하는 호텔 내 레스토랑에도 자주 찾아왔는데, 호텔 어디에도 따로 밥그릇이 없는 걸 보면 원래 사는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이 외눈 고양이 친구가 찾아오면 마치 이글루 속에 따뜻한 난로가 하나 들어앉은 것처럼 든든했다. 





외눈 고양이를 제외하고 나와 마찌아가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을 꼽자면, 레지던시 관계자 중 한 명이 아닌 이곳 호텔을 전담하고 있던 레스토랑 요리사였다. 아침에는 간단한 조식 뷔페가, 저녁에는 메인 메뉴가 제공되었는데, 이때는 요리사의 실험 정신이 아낌없이 표현된 특별 메뉴들로 구성되었다. 외지인의 방문이 드문 이 호텔에 처음으로 장기 투숙하는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을 대상으로, 그는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여 내놓은 새로운 메뉴를 검증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매일매일 실험적이었던 바스토프 호텔 요리사의 디너. 센스 있게 예약석도 준비해주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 감사하기도 하고, 정성이 고마워서 되도록이면 다 먹으려 노력했지만 마찌아는 먼저 두 손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리사의 비장의 무기였던 카푸치노 라이스, 사슴 스테이크 등은 비위가 강한 편인 나에게도 힘든 메뉴들이었는데 평소 간을 약하게 한 건강식이나 생식을 추구하던 마찌아에게는 더더욱 곤욕이었던 것이다. 저녁 시간이 되면, 마찌아는 으레 내게 '나는 이번 저녁은 패스할게'라며 옅은 미소를 뗬다. 그녀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래 아침에 달콤한 것을 아주 간단히 먹는다며, 아침도 초콜릿 한 입으로 때우곤 했다. 음식 취향은 잘 맞지 않았지만, 요리사의 위트와 입담은 고요한 겨울 저녁을 따스하게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다소 괴짜 같은 면이 있었지만, 준비한 음식의 인기가 저조하더라도 상처 받기보다는 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려는 긍정 에너지가 충만했다. 음식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매번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선보여야 하는 우리에게도 왠지 모를 위안이 되었다.


기상천외한 음식은 호텔 밖에서도 이어졌는데, 혼자 버스를 타고 놀러 간 로스톡(Rostock)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맞닥뜨린 것이었다. 모양은 괴상망측하지만 맛 하나는 기가 막히는 바나나 튀김(Gebackene Banane)이 그것이다. 구운 바나나라고 쓰여있지만 밀가루를 두르고 기름에 퐁당 빠졌다 나온 영락없는 바나나 튀김이다. 꽤나 중독적인 맛이라 독일의 다른 지역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도 찾아보았지만 지역마다 먹거리가 달라서 이날 이후로는 다시 먹어보지 못했다. 

 




말발굽, 스패너, 볼트, 너트 등 온갖 공구들 모양을 실사이즈 그대로 갖춘 초콜릿 집도 인기가 좋아서 줄이 끊이지 않았는데, 어두운 곳에서 보면 진짜로 스패너를 뜯어먹는 것처럼 보여서 몰래 웃음을 짓고 말았다. 


따뜻한 머그잔에 내주는 뱅쇼를 한 잔 마시며 거리를 걷는 동안,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갖가지 오르골과 차임벨 소리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달콤하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차가운 공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한 시간 남짓,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가로질러 다시 고요한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반짝이는 잔상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행복한 이들의 설렘으로 가득 찬 들썩이는 공기 속을 걷다 온 것만으로도, 홀로 보내는 연말을 뭉근하게 데우기에는 충분했다.




2011년 독일 북부 소도시 로스톡(Rostock) 크리스마스 마켓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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