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 Jo Feb 20. 2016

도심 속 공생

첫 출항 - 호주의 워홀러


갈매기 형님들


 멜번 땅을 밟은 지 한 달이 채 못되었을 무렵, 처음으로 잉크를 꺼내 슥슥 그려낸 것은 이곳의 첫인상에 관한 나의 총평이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내게 갈매기는 바다에서 날아온 쪽지와도 같은 반가운 존재였다. 말끔하게 빠진 순백의 몸체 위에 늦봄의 햇살이 반지르르 흘러내리는 그 모습을 도심 속에서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주립도서관 앞 푸른 잔디 위에는 물 반 고기 반이 아닌, 사람 반 갈매기 반의 풍경이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멀리 있어 반갑던 이 녀석들은 함께 살면 살수록 그 실체를 드러내었고, 나중에는 아련하기는커녕 그저 비둘기보다 크고 먹성 좋은 비둘기 8촌쯤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길바닥에 누군가 감자튀김이나 빵 조각을 떨어뜨리는 즉시 눈을 부라린 갈매기들이 달려들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비둘기들은 번번이 쪽도 못쓰고 싸움에서 패배했다. 서울 비둘기들과는 달리 삐쩍 마른 이곳 비둘기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레스토랑 밀집지역에서 밀려난 마른 비둘기들은 시내 곳곳을 다니며 생존 경쟁을 벌였는데, 먹이에 극도로 집중한 나머지 트램 철로에 날아들어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화창한 정오에 야라강변을 걷다 보면 종종 격분한 호주 아주머니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데 그건 대부분 버릇 나쁜 갈매기들의 짓이다. 순식간에 날아들어 아직 손도 안 댄 음식에다 그네들의 검붉은 부리를 들이밀기 일쑤니까. 


“Go away, Crazy! That’s mine!”



포썸?


 보통 호주에 있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캥거루나 코알라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개체수가 부족한 코알라는 동물원에 가야 겨우 볼 수 있고 캥거루 같은 경우엔 차를 타고 교외에 나가야 적당한 곳에서 야생의 무리들을 만날 수 있다. 꼭 도시에서 봐야겠다면 레스토랑에 가서 캥거루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된다. 그러나 이미 유명한 이들만  주목받으면 재미없지 않은가. 여기에 해질 무렵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포썸(possum: 나무 위에 사는 유대목  동물)이라는 친구가 있다. 나무 구멍에 서식하기 때문에 빼꼼 내민 얼굴만 보면 다람쥐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람쥐보다는 훨씬 크고 코는 두더지 같은데 커다란 눈은 미어캣이나 여우원숭이의 그것과 흡사하다. 직접 마주치기까지 아무도 이들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마주 오던 남자에게 다짜고짜 녀석의 정체를 물은 적이 있다. 


“정말 포썸을 처음 본단 말이야? 하하, 꽤 귀엽지만 조심해. 아주 사납거든!”


 무엇이든 관찰하기를 즐기는 나는 남자의 경고 따위는 금세 잊고 나무 구멍으로 다가갔다.

‘저 귀엽게 생긴 게 사나워 봤자지’ 생각하면서.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 콘을 내밀자 우습다는 듯, 녀석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순식간에 콘을 낚아채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적어도 날 경계하는 척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호주와 영국에서 고양이들은 대체로 가필드 몸매를 한 귀족들이고 우리나라의 길고양이 포지션은 호주에서는 이 포썸이, 영국에서는 여우가 맡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밤에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뒤지거나 쥐 같은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먼저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밤길엔 모쪼록 조심, 또 조심이다.



말은 거리 노동자


 멜번 시내에 한국 기준으로 제대로 된 역이라고 말할 만한 역사는 4곳뿐이다.  그중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멜번 센트럴 역과 플린더스 역을 잇는 스완스톤 스트릿은 버스커들의 집결지이자 기념품 상점이 즐비한 필수 관광코스이다. 이 거리의 공기에는 알 수 없는 구수한 향기가 언제나 덧발라져 있는데 바로 배설물 통을 차고 하루 종일 일하는 말들 때문이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한 옛날식 마차들이 항시 대기 중이지만 비싼 요금 탓에 손님이 많지는 않다. 그냥 기다렸다가 구식 트램을 타면 항구와 모래사장까지 낭만을 실어 데려다 주는데 굳이 그 거리만 왕복하는 마차를 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눈 옆을 가리고 큰 깃털 장식을 머리에 단 우아한 말들은 마차 주인이 공수해다 주는 당근 조각을 한 바가지씩 먹고 그만큼의 양을 근무 중에 배출한다. 마차 주인은 그 배설물 통을 늘 비우러 다니는데 대체 어디에다 버리는 건지는 추적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어쨌든 거리에 밴 야릇한 냄새로 봐서는 멀지 않은 곳에 버리는 모양이다. 멜번은 중국인들이 상권을 꽉 쥐고 있는 터라 중국식 찻집과 레스토랑이 많은데, 그 특유의 향신료 내음과 혼연일체가 된 말똥 냄새는 내가 어디쯤 걷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신호가 되어주곤 했다.  



무차별 파리 폭격


 도심 속에서 공생한다는 것이 탐탁하지는 않아도  인정할 수 있는 동물들이 있는가 하면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생물도 있다. 바로 파리. 멜번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자부하고 있던 나에게 충격의 여름을 선사해 준 녀석들이다. 크기는 건포도 만한 것부터 손톱 만한 것까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눈과 입으로 미친 듯이 돌진하니 방심하고 입을 벌렸다간 불상사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나의 친구 중 한 명은 자신이 잘 나온 사진을 확대했다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웃고 있던 친구의 이에 순간 파리가 붙어 이가 빠진 것처럼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음식이 아닌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걸까. 수소문 끝에 얻은 답은 결국 수분이었다. 답을 알려준 호주 친구들은 오히려, 이 정도는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울룰루 인근 사막 지방에 가면 양봉할 때 쓰는 망으로  온몸을 가려도 새까맣게 파리떼가 들러붙는다면서. 그 말을 듣고, 남들이 사랑을 외치든 말든 세상의 중심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파리와 동행하는 영화 촬영지 따위,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새 말고 박쥐


 사실은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저녁 풍경이 순간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언제나 높은 하늘을 빙빙 도는 새 무리가 갈매기 혹은 기러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저녁놀이 질 때쯤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날도 공원 몇 개를 지나 도클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칼튼 가든을 지나려는데 어느 커다란 나무에 새 떼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낌새가 이상했다. 나무 기둥 아래에 도착해 위를 올려다보니 기둥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마다 대롱대롱 수 백 개의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수 백의 곱절을 이룬 눈동자들이 꿈뻑꿈뻑 나를 향해 동공을 움직였다. 나무 뒤로 듬성듬성 보이는 칼튼 가든의 고건물과 박쥐 떼의 조합에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알고 보니 그간 스타디움 위 분홍빛 하늘을 수놓던 새들 역시 박쥐였고, 언젠가 좋다고 사진기를 들이밀었던  아름드리나무는 박쥐의 본거지였다. 그 이후로 그 공원은 낮에만 즐겨 찾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물론 나의 호주 친구들은 내가 떠나기까지 멜번 박쥐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근무중인 말들, 나무 구멍 속 포썸, 그리고 해 질 녘의 도클랜드.


매거진의 이전글 버스커로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