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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Feb 18. 2016

버스커로 살기

첫 출항 - 호주의 워홀러


나의 첫 소장자


뙤약볕 아래, 여느 날처럼 자리를 펴놓고 잉크 드로잉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고개를 드니 엄청난 속도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묵직한 컴퓨터 부품 박스를 양손에 움켜쥐고 고개는 꼿꼿이 정면을 향한 것이 누가 보아도 바삐 지나갈 사람이었다. 스쳐 지나는 찰나, 남자는 갑자기  두세 걸음을 되돌아 오더니만 맨 앞쪽에 놓인 작은 드로잉을 사고 싶다고 했다. 원칙적으로 버스커는 도네이션은 받을 수 있어도 가진 것을 판매하지는 못하게 되어있다. 매우 형식적인 원칙이라 경찰도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긴 하지만, 별로 팔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무슨 말은 해야 했다.


“나는 그림 값을 정해본 적이 없는데…….”


“그래? 꼭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팔면  안 되니?”


“글쎄, 그래도 되긴 한데…….”



내가 쭈뼛쭈뼛 어쩔 줄을 모르자 남자는 갸우뚱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100불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그림을 들고 다시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에게는 아마도 초등학생같이 보였을 이방인에게서 주저 없이 그림을 산 것이다. 당시로서는 학생이었던 데다 작았던 그림 사이즈까지 감안하면 꽤나 좋은 값이었다. 일주일 치 집세가 순간 생긴 셈이니까.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그림 값을 물어오면 나름의 형평성을 위해 전과 비슷한 크기의 그림은 100불 정도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한 소녀의 전재산


하지만 언제든지, 유독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림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형편대로 값을 지불하게 했다. 한참을 서성 거리던 한 소녀에게, 첫 소장자가 산 것보다 두 배는 큰 그림을 내어준 적이 있다. 그냥 낼 수 있는 만큼만 내고 가라고 했는데도 소녀는 기어코 지갑에 든 돈을 모두 털어 내게 주었다. 전 재산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 그림이 좋다는 뜻이었다. 동전 몇 잎을 내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어린 친구였는데도 마음을 전할 줄 알았다.


나는 그 날, 보이는 14불과 함께 보이지 않는 억만금의 진심을 받았다. 소녀에게 받은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풍성한 것이라, 후에 어쭙잖은 비즈니스를 하려 드는 어른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아는 많은 어른들은 내게서 14불에 그림을 살 줄 모른다. 그나마도 사려고 하면 다행이다. 나중에 억대가 될지 모르니, 되팔게 하나 그냥 달라고 그렇게도 무례한 말들을 해댄다. 슬픈 일은, 아직 나의 고국에서는 저 소녀와 같은 진심을  지불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례한 어른들의 비율이 내가 머물던 어떤 곳보다도 현저히 높다는 것 또한.



네 집으로나 가버려, 동양인!


예술은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그리고 실상 그렇게 되기 쉬운 구조인)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내가,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이들을 존중하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이야기에 동참할 줄 아는 남녀노소의 사람들을 매일매일 만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문제를 일으킬 분자들은 존재한다. 하루는 약에 취한 듯한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흥, 잉크 부는 것 따위 아무나 할 수 있어! 네 집으로나 가버려, 동양인!”


“가지 말래도 갈 거니까 네 갈 길이나 가!”


달래듯이 쏘아붙이자 여자는 잘됐다는 둥 구시렁거리며 휘청휘청 사라져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한 일이었는데, 이 스물두 살의 워홀러는 참으로 거침이 없는데다 패기로 살짝 가려 놓은 무모한 기질도 있었다. 그래도 그 숱한 거리 전시를 하면서 이런 일이 단 한 번 뿐이었다는 건 호주는 안전하다는 평에 힘을 실어줄 만한 사례이다. 호주 교민들이 농담으로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호주는 재미없는 천국’이란 말들을  종종하곤 했는데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스펙터클한 일이 너무 없어서 나중에는 실없는 사람이 던진 ‘액자는 어디서 샀느냐’는 질문이 마치 시비를 거는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낙타를 그려줘


 그림을 챙기며 그날 전시를 마무리하던 중, 길을 가던 한 중화권 남자가  뜬금없는 부탁을 해왔다.


“낙타 좀 그려줄 수 있니? 주문하는 거야.”


주문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라,  별생각 없이 연락처를 받고 완성되면 연락을 주겠노라고 했다. 금방 갈 것 같았던 남자는 신문을 들이대며 한 시간 남짓 자신의 소수민족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정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떠났다.


며칠 후 그림이 완성되어 전화를 했지만 바쁘다, 아프다 하는 이유로 약속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나는 실컷 그 사람의 일방적인 이야기도 들어주고, 말로 한 약속이지만 그림도 그려 놓았는데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나지 않으니 영 석연치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이 일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걷던 길에서 그 남자를 마주쳤다. 남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져 돈을 쥐어주고는, 그림은 정말 주지 않아도 괜찮다며 도망치듯이 가버렸다. 정말 아팠었는지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길에서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헤어질 것이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좀 더 성의껏 들어줄 걸 그랬나?’


나는 마치 독립투사의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오래지 않아 망각의 동물 행세를 하며 집세에 보태어 써버렸지만.


내게 작은 행운이 되어 준 낙타의 행렬



127불이 없었다


다른 때보다 조금 습기 차고 후덥지근한 여름날, 나는 무거운 거리 전시용 물품들을 둘러메고 야라강으로 향했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 치 집세를 내야 했지만 127불이 모자라 동전이라도 그러모아보자고 나간 것이었다. 강변은 주말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침 F1 자동차 경주 시즌이라 평소보다 더욱 북적거렸다. 낑낑거리며 가져온 것들을 거리  한편에 설치하고는, 벤치에 앉아 멜번의 최고층 건물 유레카 타워와 거리의 모습들을 새 종이에 그려나갔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때론 금빛, 때론 은빛의 동전들이 튀어나왔다.


한 행인은 주인 잃은 낙타 그림을 가만히 보더니 그림 잘 보았다며 20불을 놓고 가기도 했다. 아직 집세를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여의치 않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르바이트 동료나 셰어 메이트 중 한 명에게 나머지 금액을 빌릴 심산이었는데, 부탁하는 입장에서 빌릴 금액의 앞자리 수가 하나 없어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슬슬 정리를 하려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세 사람이 다가와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한 동양계 남자가 동물 드로잉들을 보더니 동양의 ‘띠’ 문화를 화제 삼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도 거들며 한참을 웃고 떠드는데, 남자가 갑자기 우리말로 물어왔다.


“저, 혹시 한국 분이세요?”


“앗, 한국 분이셨어요?”


무슨 이유에선지 서로 상대방이 절대 한국인은 아닐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은 8살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었고 지금은 F1 스텝으로 잠시 멜번에 방문했다며, 낯선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한국인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고 사뭇 놀라워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려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를 해대던 와중에, 남자는 별안간 그림을 좀 살 테니 골라달라 청했다. 나는 이 사람이 그림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을 감안해서 무난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두 장을 집어 주었다. 그림은 더 주었지만 이 일도 의식주가 받쳐 줘야  계속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세 사람과 인사를 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오늘 모인 돈은 동전까지 합쳐 딱 127불.


나는 내일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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