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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Feb 10. 2021

2013_나무가 스러져간 자리엔 스무 해가 만발하였다

기대가 스러진 자리


요즘처럼 내 또래들 사이에서까지 투자의 열기가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부동산이 부의 계층을 올리는 사다리 역할을 상실하면서, 적당한 종잣돈을 쥔 직장인들은 채권, 주식, 펀드 등 다양한 투자처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주식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건 3년 전이지만 아직도 겨우 와인 한 병 값으로 한 주, 두 주 사 모으는 변두리 개미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투자라 칭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재무제표에 나타난 여러 지표를 보고, 아직은 저평가되었다고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끌림이 있는 기업의 주식을 사곤 하는데, 문득 두 번째 개인전에서 80호 작품을 사 가셨던 어느 중년 부부가 떠올랐다.


갤러리 관장에게 유망한 작가인지 묻고, 가격을 협의하고 집으로 배송을 맡기고 가셨던 그분들 역시 나의 미래 가치에 '투자'를 한 분들이다. 그런데 밥벌이를 하겠다고 7년이나 제대로 된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그분들에게 내 작품은 거래정지가 되어 휴지조각이 되기 일보직전인 주식이나 다름없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무가 스러져간 자리엔 스무 해가 만발하였다 Mt.Goryeo, Acrylic on canvas, 145.5×112.1cm, 2013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던 삼청동 초입의 갤러리 입구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이 그림은 강화도의 고려산을 표현한 것이다. 매년 진달래 축제가 다가오면, 한쪽은 침엽수, 한쪽은 진달래 군락을 이룬 고려산의 매력적인 자태가 드러나는데, 여기엔 큰 아픔이 숨겨져 있다.


1983년 일어난 큰 산불로 인해 한쪽 사면의 나무가 모두 재가 되어버린 것. 하지만 나무가 사라진 황량한 땅에 진달래가 하나 둘 피어나더니, 20년 후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내가 나의 가치를 모르고 그저 지나온 타임라인 곳곳에, 미술 투자자이건 개인 콜렉터이건 물적 재화나 심적 지지로 나의 가치를 일러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 오랜 기다림으로 기대가 스러진 그 자리에, 이제부터라도 하나 둘 꽃을 피워가려고 한다.


그 기대가 차익 실현이건 정신적 안정과 심미적 만족이건, 내가 가진 단단한 창작의 뿌리가 상하지 않는 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몇 배, 몇 십배로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올 3월에 좋은 공모처가 있어 8년 만에 세 번째 개인전을 가지게 되었다. 3월 16일부터 2주간, 정말 오랜만에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시간. 일이 바빠 체력에 한계가 오기는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30대의 시간을 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쓸 수 있도록, 부단히 움직이려 한다.


과거의 기대가 실현되는, 그리고 미래의 가치를 선점하는, 기대와 가치가 공존하는 그 자리에서 얻게 될 깨달음이 향후 몇 년 간 나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임을 안다.


기대가 스러진 자리에 만발할 진달래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바라볼 날이 생전에 오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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