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특유의 나무라는듯하지만 다정한 말투로, 채근하는듯하지만 혼잣말로 0호 뒤에 대고 수 없이 하셨을 말일 것이다.
그냥, 내가 지금 1호와 2호에게 하는 말들일 것이다.
그냥, 늘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말들...
이제야 철이 들었다고 고백한 우리 0호는, 놀랍게도 판단이 빠른 편이다.
세 살의 1호가 장난감을 한 상자 쏟아붓고 놀다가, 공놀이를 하다가, 또 갑자기 나가자고 하며 한창 혈기 왕성할 때, 0호는 조심스럽지만 아주 빠르게 1호에게 ADHD 진단을 내렸다. 애들은 또 왜 이렇게 아픈 게 잦았는지. 학습의 효과 탓인가. 1호나 2호의 체온이 37도만 되어도 0호는 해열제와 물수건을 준비하고 대기한다. 얼마 전에는 1호의 피부가 매끄럽지 않다며 피부병을 확신했다. 피부과 의사가 그 부위는 닭살이라고 명명해줬음에도 0호의 자기 확신은 며칠 더 갔다.
우리 0호는 무서움도 잘 탄다.
연애 때 놀이기구를 잘 못 탄다 할 때까지만 해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롯데월드에서 무용수 언니들의 화려한 퍼레이드 공연만 보고와도 좋았으니까. 연애는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결혼 후 미국에서 살 때였다.
0호는 쓸개에 담석이 생겨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의사는 간단한 복강경 시술 방식이라 금방 끝난다고 했다.
(병원 가는 길에 0호는 빠른 판단력을 발휘하여 유언도 했다.)
드디어 수술하는 날.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기도를 해볼까 하던 차 0호의 수술방 번호 색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수술 준비 과정에서 기본 체크를 하던 중, 0호의 혈압이 치솟아서 수술이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0호는 입원실에서 하루 더 대기했다가 다음 날, 정상수치임을 확인하고 수술실로 향했다. 5분 후, 0호는 수술실에서 또 쫓겨났다.
우리 0호는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어필했지만 의사도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의사는 큰 수술이 아니라고. 릴랙스~릴랙스~를 외쳤지만 혹시 모를, 만의 하나의 확률을 위해 혈압이 오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며 0호를 일주일간 병원에 가둬두고 이것저것 검사했다. 결국 아무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수술을 감행했다. 결과는 성공적.
그렇게... 우리 0호는 쓸개 없는... 사람이 되었다.
쓸개가 없으면 간이 그 역할을 맡아한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니까 더 튼튼해질 거라 생각했다.
한창 고집부리는 미운 네 살의 2호와 하루를 보낸 어느 저녁, 우리 0호는 내게로 와 고백했다.
"나, 쟤가 무서워."
간이 콩알이다.
이즈음 되면 '나는 왜 결혼하게 되었나'라는 합리적의심을 해볼 만하다.
대외적으로는 0호의 외모를 보고 결혼했다고 말한다. (암요...)
연애 시기 0호는 종종 시골 얘기를 자주 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서울에서 일하면서 4남매를 키우기란 그 시절에도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의 막내 4호는 방학 때마다 늘 외할머니가 계시는 경북 상주에 맡겨졌었다고 한다. 아무런 잔소리를 할 사람이 없는 시골은 4호에겐 천국이었다. 아침부터 나가서 놀다 어둑어둑 해지면 집에 와 할머니가 해주시는 고봉밥에 쓰러져 자는 자연인의 생활을 매 방학마다 했다. 논과 밭 사이로 난 냇가에서 배고프면 개구리 잡아먹고, 메뚜기도 잡아 구워 먹고, 물고기도 잡고, 잠자리도 잡고. 눈만 돌리면 모두가 내 땅 같은 너른 들판에서 맘껏 뛰놀고, 졸리면 원두막에서 낮잠을 잤다. 수박과 참외 서리도 곧잘 해서 간식까지 챙겨 먹으며 그 일대를 운동화가 닳을 때까지 온종일 놀았다.
혼자 놀아도 좋고, 이름도 기억 안나는 친구들과 종일 놀아도 좋았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4호가, 아니 우리 0호가 나는 좋았다. 정확히는 0호의 마음 한 켠을 채우고 있는 그 유년의 기억이 좋았다.
나도 논밭 한가운데서 같이 0호 뒤를 따라 시골 바람도 느끼며 달리고, 도랑에도 빠져보고, 까르르 한바탕 웃고 노는 기분이 났다.
그래서 결혼하기로 했다.
1호가 태어나고, 2호가 태어났다.
외모는 닮았으나, 너무나 다른 세 아들로 이루어진 완전체가 이루어졌다.
완벽한 팀워크를 발휘할 것 같았지만 0호, 1호, 2호와 매일매일 즐겁게 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0호는 어쩌면, 딸 하나에 아들 둘을 키우는 삶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만)
부루마블 게임을 처음 하 던 날, 내리 연속 세 번을 지고 울먹이는 1호에게 말했다.
"엄마는 이거 8살 때부터 했었어. 너도 이제 시작이야. 괜찮아."
"뭐? 엄마는 나 이기려고 8살 때부터 이걸 한 거야?"
'그래, 오늘을 위해 30년을 연마했다!'
그날 저녁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신생아 때부터 예민함의 극치였던 2호는 24시간을 안자는 날들 덕에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안고 재웠다가 내려놓기만 하면 울어대는 바람에 새벽마다 나와 신경전을 벌이면 0호가 와서 2호를 데리고 나가 1시간 이상 안고 있다 재웠다. 몇 번 되풀이되니 돌 전의 2호는 나와 자는 걸 거부했고 이후 5살이 되어서야 우린 합방을 했다. 그 첫 날밤을 위해 난 얼마나 빌었던가.
나도 2호가 무섭다.
서로 다른 세 아들이 하나가 될 때가 있다.
여름이 되면 셋은 잠자리채 하나씩 들고 매미 원정대를 떠난다.
아파트 정원 구석구석, 뒷산 작은 산봉우리를 누비며 매미 사냥에 나선다.
매미도 잡고, 매미 허물도 수 십 개 발견하고, 운 좋은 날엔 하늘쏘도 본다. 말벌을 보면 줄행랑 치기 바쁘지만, 메뚜기, 사마귀, 방아깨비, 딱정벌레, 노린재 등등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잡아 관찰하고 대화하고 놓아준다. 0호는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가 1호, 2호와 함께 나무 사이사이 뛰노는 아이가 된다. 얼굴엔 땟구정물이 흐르고,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오는 세 명의 0호가 된다.
물 한 통과 잠자리채만 있으면 3시간 각.
요즘 유튜브에서 즐겨 보는 채널에서 존스홉킨스 소아정신과 의사인 지나영 교수님 강의를 들었다. 아이의 존재에 대해 사랑해주라고 말한다. 육아는 밥 짓기와 같아서 쌀과 물을 섞어 적당한 불로 지펴주면 밥이 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쌀은 현미로 바뀌지 않고, 보리로도 바뀌지 않는다. 쌀은 쌀이다. 적당한 물을 채워주고 충분한 불로 끓여주면 되는 것이다. 지나영 교수님은 쌀과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사랑의 물과 가치와 마음자세를 담은 불이라고 알려주신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들이기에 육아는 존재에 대한 사랑의 물과 불을 더해주는 것.
학교 가려고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자, 다 같이 따라 한다, 나는!”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학교 잘 다녀와~”
어리둥절해하며 잠시 멍했다가 둘 다 마법에 풀린 듯 시시덕거리며 문을 나섰다.
지나영 교수님의 본질육아를 알기 이전에도 모든 전문가들에게 숱하게 들은 말이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도 소중하다고.
아이들만 소중한가? 나도 소중하고 0호도 소중하다. 모두 존중받고 사랑받을 금쪽이들 아닌가. 0호, 1호, 2호 모두 일터로, 학교로 보내고, 혼자 집안 청소하다 문득 나에게 말해주었다.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처음엔 혼자여도 누가 볼까 괜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따금씩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1호, 2호가 만든 종이비행기가 방바닥을 가득 채워도,
씻고 옷 갈아입혔는데 볼 뻘겋도록 뛰놀아 다시 땀에 젖은 1호, 2호의 등짝을 볼 때도,
평일에는 아침잠에 눈도 못 뜨지만 게임 시간 부활하는 일요일에 7시에 일어나는 1호, 2호의 빛나는 눈과 마주칠 때도. 조용히 읊조린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너희도 가치 있는 사람이다!’
이른 새벽 시간에 출근하는 0호를 배웅하다 갑자기 외쳤다.
“자, 따라 해 봐~ 나는!”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어, 애들이랑 해~”
휘리릭, 바로 나가버렸다.
현관엔 정적만이 흘렀다.
‘아아! 어머니~ 4호 키우기 참 쉽지 않으셨겠어요~.’
나중에 어머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생전에 못 다하신 4호의 탐구생활 이야기를 더 들어줘야지. 4호에게 했던 말들을 40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 줄 것이다. 그때 등 뒤로 했던 말들을 어머니의 4호가 다 듣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