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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빛사냥 Oct 18. 2022

[아들생활탐구보고서] - ⑨ 공부

공부는 왜 하냐고 묻거든.

  영어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원장님의 건강상 이유로 초등부를 없애고 중고등 위주로 시스템을 바꾸게 되어 1호는 예상보다 3개월 일찍 중등 시스템으로 들어가고, 아쉽게도 2호는 학업이 중단된다는 것이다. 이제야 학원 시스템에 적응하는 1호, 2호였기에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했다. 다행히 1호는 2호 없이도 혼자 다닐 수 있다고 했다. 학원을 거부하던 1호를 적응시키기 위해 꼽사리로 같이 다녔던 2호의 러닝메이트 역할은 다한 셈이라 나름 성과 있는 투자였다.     

 

  2호의 학원 라이프는 거기서 끝일 줄 알았는데, 학원을 한 번 다니다 안 다니게 되니 뭔가 허전하다.

형보다 일찍 학원 맛도 좀 봤고, 아직 3학년이니 나랑 같이 공부하다 나중에 학원을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제 조금 레벨 업하는 성취감도 보고 지독히도 안 되던 단어 외우기도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학원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한 달 넘게 놀다 2호는 다른 학원에 등록했다.    

  

  한 달여간의 달콤한 땡땡이 시간 탓인지 2호는 학원 적응을 힘들어했다. 2번의 출석 후 과제와 단어시험에 과부하가 왔고, 4번째 수업을 앞둔 저녁, 폭발했다.      

“영어는 왜 공부해야 해?”

“한국말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와 같은 대답이야. 너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눌 때 꼭 한국사람만 만날 건 아니니까 기본적으로 영어는 하는 게 좋지. 영어 알면 구글에서 더 많은 정보도 찾을 수 있잖아. 해외 공룡 정보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 수 있어!”

“파파고로 다 번역해 주는데?”

“그건 말도 어색하고 의미 전달이 잘 안 돼. 해외여행 갔을 때 사람 앞에 두고 핸드폰에 얘기하는 것도 그렇잖아.”

“여기는 숙제도 많고, 단어도 너무 많아서 힘들어. 나 그만 다니고 싶어. 엄마랑 공부하면 되잖아.

“음... 그래, 힘들지. 숙제도 좀 많은 거 같네. 근데 3번 다니고 포기하는 건 너무 빠르지 않아? 엄마가 3개월치를 돈 낸 거 같은데. 그리고 엄마랑은 언제든 같이 할 수 있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 한 나 자신에게 놀라던 차, 2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서러움에 2호는 연필을 내동댕이치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2호의 3 연타 질문에 명쾌한 답을 못한 미안함까지 더해져 어째야 할지 몰라 우는 애를 지켜보기만 했다.

"울어서 마음이 풀리면 더 울어도 돼~"

잠시 잦아들며 내 눈치를 보길래 한 마디 해줬을 뿐인데 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그만 울으라 해도 더 울 걸 알기에 그냥 뒀다.

남편이 2호를 데리고 방으로 갔다. 한참 뒤,  2호는 차분해진 얼굴로 나왔다. 아빠가 틀어준 백색소음 들으며 숙제를 다 마쳤다고 굳나잇 인사를 하고 갔다. 2호의 작은 어깨가 더 작아 보였다.


이렇게까지 공부를 시켜야 하나


  학원을 당분간 끊을 것이냐, 숙제가 적은 학원을 알아볼 것이냐.

이거 하나도 벅차 하는데, 앞으로 공부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기다려줄 것인가, 밀어붙여서 적응하게 할 것인가.

이게 이렇게 고민할 일인가!

대체 공부는 왜 스스로 안 하고 시켜야 하는 거야.

(라떼는 말이야~ 공부는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였거든!)


  다음 날,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2호의 표정이 밝다. 숙제 잘해왔다고 스티커도 받았댄다.

"2호야, 엄마가 보여줄 게 있어."

"뭔데요~"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기 전에 살았던 집이 있어. 2호도 기억해? 토마스 할아버지 3층 집. 그 집에서 이사할 때 할아버지가 엄마 불렀어. 엄마 짐 가져가라고. 가보니까 옥상에 이~만한 상자가 10개 있는 거야. 엄마가 진짜 놀란 게 뭔지 알아? 그 10개의 상자 중에서 6박스가 다 영어였어. 미국 드라마 대본,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 영어 대본, 직접 만든 단어집, 영어로 된 각종 리포트 자료들을 다 모아놓았었더라고. 왜 안 버렸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그거 보고 엄마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어."

"뭔데요~"

"엄마는 중학교 1학년 때 영어를 처음 배웠거든. 중1 때 알파벳 시험도 봤었다! 너는 지금 3학년인데 엄마보다 더 잘하는 거야!"

"근데요~"

"근데, 엄마는 영어가 너무 어려웠어. 중학교 입학해서 처음 본 영어 시험 점수가 80점도 안 나온 거야. 너무 충격받았어."

"그래서요?"

"영어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고민이 됐는데, 마침 친구들이 같이 공부하자고 해서 공부방에 갔거든? 거기는 단어 시험을 한 번 볼 때 200개를 외워오랬어. 2호 학원에서 시험 보는 단어가 몇 개지?"

"11개요. 아~ 15개 볼 때도 있대요."

"그래~ 엄마도 11개나 15개는 해볼 만했을 텐데 200개니까 너무 놀랐어. 그래서 처음 200개 외울 때 4시간 걸렸어. 그러다가 한 달 지나니까 2시간, 그다음엔 1시간. 시간이 줄어들고, 꾸준하게 하니까 2학기 때 엄마 영어 점수 몇인 줄 알아?"

"100점?"

"그건 확실치 않지만 90점은 넘었어. 그리고 듣기 평가도 듣는데 무슨 말인지 다 알겠는 거야. 너무 신기했어. 그래서 그 뒤로 영어는 매일매일 꾸준하게 공부해서 고등학교 때는 영어로 된 두꺼운 책도 읽었다! 대단하지!"

2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은 늘 힘들어. 어렵고. 계속 연습하면 재밌을 때도 있고 그런 거 같아. 너도 처음 하는 게임은 뭔지 잘 몰라서 계속 죽잖아. 게임을 할 줄 알면 재밌지? 공부도 그래. 참, 엄마의 상자 10개 중에 6개는 영어라고 했지? 나머지에는 뭐가 있었는 줄 알아?"

"뭔데요~"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편지랑 일기. 독서록이랑 영화감상문 이런 거 다 있었어!"

"일기? 보여줘요!!"

"에이. 엄마가 몇 년에 걸쳐 쓴걸 쉽게 볼 순 없지. 숙제 있지? 일단 그거부터 해~"

고대 유물을 만나는 시간. 흰 장갑이라도 줄 껄 그랬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으랴. 

1호와 2호는 엄마 일기를 보겠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숙제를 하고 덤으로 책상 정리까지 하고 나서야 일기님을 접할 수 있었다.

1호에겐 6학년 10월의 일기만을, 2호에게는 3학년 10월의 일기만 열람이 가능해서 1호, 2호는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읽어갔다. 자기 또래의 엄마가 들려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함께 웃고 보는 사이 11월까지 넘어가서 스탑! 을 외쳤다. 대신 각자의 생일날과 어린이 날을 열람하는 보너스 기회를 주었다.

30년 전의 엄마가 1호의 생일날 무얼 했는지, 2호의 생일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린이날 친구와 탁구를 치고 나서 탁구와 축구를 제일 좋다고 한 어린 엄마를 접하고 1호와 2호는 꽤나 반가워했다.

"엄마 일기는 너무 감성적이라서 읽을 때 좀 오글거려."

한참 읽던 1호가 감상평을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사춘기 없이 지난 줄 알았는데 6학년 때 감정의 기복이 일기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제목이 '인생 말년 증상'도 있다!


  코로나가 조금 풀리면서 2학기에는 본격적인 견학과 체험활동이 늘어났다. 지난달에는 2호가 입학 후 처음으로 도시락 싸들고 민속촌으로 소풍을 다녀왔다. 다음 주 에버랜드 소풍을 앞두고 1호는 일주일간 밤마다 두근거려서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일기 속 6학년 나에게도 두근거리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수학여행이었다. 2박 3일간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에 대해 며칠을 언급하며 손꼽아 기다려했다. 지금 1호가 에버랜드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러나, 수학여행 전 날 사달은 일어났다. 바지 2개를 싸가야 한다는 딸과 1개면 충분하다는 엄마와의 실랑이가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딸의 승리로 바지 2개를 싸갔다. 그리고 그다음 이틀간은 엄마의 글씨로 일기가 채워져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는 못내 바지를 2개나 싸간 딸이 마땅치 않았으나 부디 잘 놀다 오길 바란다고 써주었다. 덧붙여 일기에는 엄마의 1호가 없는 시간 동안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빠와 2호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엄마는 첫 날, 2장에 걸쳐 쓰셨고, 둘째 날에는 아예 원고지를 덧대어 긴긴 일기를 쓰셨다. 그리하여 3학년 3월 2일에 시작한 나의 일기는 6학년 졸업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채워졌다. 일 달력을 하나하나 넘기듯, 차곡차곡 쌓여있는 일기에는 초등 4년의 기록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공부란, 꾸준히 쌓이는 거라 생각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것도 아닌, 그냥 하루하루 적어 나간 기록이 습관이 되고.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대본을 출력해서 하나하나 읽어 나가며 영화의 장면을 다시 마음에 새기다 보니 긴 원서를 읽게 되고. 책을 읽고 못내 책장을 덮기 아쉬워서 맘에 드는 한 문장을 적으며 시작한 게 두툼한 독서록이 되었다. 공부라기보다 그냥 하루하루의 내 모습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10개의 상자 안에.


"엄마 일기는 언제까지 썼어?"

"글쎄. 중1까지는 꾸준히 썼고 그 뒤에는 바빴는지 띄엄띄엄 고등학교랑 대학교까지 있기는 해. 왜?"

"아, 그럼 내년까지만 볼 수 있네. 아쉽다."

"누가 보여준대? 네 거 써~ 나중에 너 아들에게 보여주게!"


  오늘 하루 1호와 2호와 함께 살아간 게, 오늘 나의 공부다.

이렇게 영어 공부해서 엄마는 동시통역사가 되었고, 이렇게 꾸준하게 일기를 써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라는 메시지를 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았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오늘의 나에게 충실한 하루를 사는 것이 공부라고 말하고 싶다.

상자를 가득 채우는 노력을 했던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순간에도 너희들의 상자에는 한 겹, 한 겹의 종이가 깔리게 되는 거라고.

엄마는 10 상자를 채웠지만 너희는 더 많은 상자를. 

아니 오직 한 상자여도 그 안에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한 1호의 모습이, 2호의 노력이 들어가 있기에 그것으로도 충분히 값진 거라고 알려주고 싶다.


하다가 힘들면 울어도 좋고,

어려워서 벽에 부딪히면 짜증 내도 되고.

아프면 쉬었다 다시 일어서면 된다.


1호와 2호가 중간에 일기를 채울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기꺼이 응원을 담아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엄마이고 싶다.

고집스러운 딸로 맘고생 많이 했을 30대의 로사 할머니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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