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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빛사냥 Sep 24. 2022

[아들생활탐구보고서] - ⑧ 이별

난 너가 쿨한 줄 알았지.

  2호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이다. 

유난히 1호보다 2호에게 더 객관화가 되고 관찰자적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나랑 닮은 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를 납득시키고 있다. 너무나 호불호가 강하고 본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반드시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얄미운 성격의 소유자여서, 아직 단어 뜻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다 놓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MBTI를 검사한 이유도 어떻게 하면 이 아이와 타협을 할 것인가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16가지 유형중 보나 마나 제일 외골수에 똥고집이 나오려니 했는데 ENTJ가 나왔다. 음... 역시 애가 단어 뜻을 이해 못 했나 보다. 1년 뒤 다시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해 봤다. 또 ENTJ가 나오네? 기관에서 정확하게 한 건 아니니까 내년을 기약해보자라며 결과를 부정했다.
그리고 2호는 10살이 되어서도 ENTJ가 나왔다. 

올해 다시 해보고 결과가 바뀐 건 놀랍게도 나였다. 심지어 I에서 E로의 변화라니. 

우리 둘 다 E였어???


  10년의 관찰 결과 확실한 건, 2호는 공룡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ENTJ는 한 가지에 집중을 잘한다고 한다.

"엄마, 나 공룡 책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세요"

이제 막 말을 뗀 아이가 책을 사달라니. 엄마로서, 서점 사장으로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책방 아들이면 모든 책을 잘 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2호는 보기 좋게 깼다. 마음에 하나가 꽂히면 아주 깊게 들어가는 2호는 세 살에 공룡을 알고 난 이후, 발음하기도 힘들고 긴 따우루스 친구들 이름을 외워가며 공룡의 세계를 탐험해갔다. 다른 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공룡들의 이름을 알고, 이후에는 초식과 육식을 구분을 하고, 그런 후에는 선캄브리아 시대, 고생대, 중생대로 가더니 더 세분화해서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를 탐색하고 나서 각 시대별 공룡을 이야기했다. 사실, 팩트체크를 하기에는 당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기였기에 '그래 니 말이 맞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니~'라며 맞장구 쳐주기에도 바빴다. 거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각 공룡들의 화석이 최초로 발견된 나라를 이야기할 땐 나도 인정해주어야 했다. 리스펙 한다, 2호!


어느 날, 남편과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사는 곳이 익숙하고 편하지만 1,2호도 대학을 가고, 군대 가고 나면 그때는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하던 참에 2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엄마, 아빠랑 같이 그때 못 살아."

미운 네 살이 막 지나 질풍노도의 시기로 접어든 다섯 살 2호의 선언에 움찔했다.

"왜?"

"난 그때 고비 사막에 갈 거거든. 새로운 공룡 화석을 발견할 거야. 그래서 같이 이사 못 가."

너란 아이. 진짜 공룡에 진심이구나. 

그 뒤로 2호는 공룡박사가 되기 위해... 공룡 그림 그리기에 매진했다.


5세부터 시작된 공룡박사, 아니 공룡화가의 외길 인생

  10년의 관찰 보고서 두 번째 팩트로, 2호와 타협은 힘들다는 것이다. 

ENTJ 특징 중 하나로 본인의 사소한 계획이라도 틀어지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 않던가. 

2호가 다섯 살 때 엘리베이터 버튼을 내가 한 번 눌렀다가 지하에서 28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서럽게 울어서 누가 보면 내가 학대라도 한 줄. 집에 와서도 서러움은 가시지 않아 결국 다시 지하로 내려가 본인이 버튼 누르고 집에 와서야 진정했다. 월드콘 초코맛을 샀다가 바닐라가 아니라는 이유로 "엄마는 나를 너무 몰라"라는 비난을 쏟아내고,  치킨너겟에 케첩이 묻거나, 돈가스에 소스가 묻어도 경악하며 맨밥만을 고집하는. 본인의 세계관이 너무나 확실한 2호이기에 단체생활이 걱정되었다. 


어느덧 여덟 살이 된  2호가 학교에 갈 무렵,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자연스럽게 학교는 안 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2호에게 스며들었다. 자기주장이 강해서 루틴을 만들어 주기 힘든 아이다 보니 학교는 무조건 가야 한다고 계속된 세뇌교육을 하던 차,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병가를 내었고, 임시 담임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그 이후 2호의 학교 생활은 그 선생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된다. 

공룡을 처음 만났을 때의 흥분된 목소리와 에너지로 학교 생활을 (정확히는 선생님 이야기를) 쏟아내는 2호는 정말 신나 보였다. 새로 오신 선생님은 과학을 좋아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하다 수업종이 울리기 일쑤며 얼토당토 한 농담으로 2호의 유머 코드에 직격탄을 날리셨다. BTS도 만났었고 문제적 남자 프로그램에 출연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2호의 우상이 되기 충분했다. 그렇게 행복한 두 달을 보내고 아쉬운 작별 후 2학년 2학기가 무미건조하게 지나가고 3학년이 되었을 때 그 선생님을 또 만나게 되었다. 

2호의 레이다는 온통 학교에 맞춰졌고 말끝마다 "우리 선생님이 말해줬어요"라며 새로운 지식을 쏟아내며 선생님을 본격적으로 추앙했다.  2호가 말해주지 않아도 선생님은 정말 많은 시도를 하셨다. VR기기를 반 아이들 집으로 공유해주시고, 소소한 선물들도 챙겨주고, 과학 교과에 맞춰 반에서 애벌레도 키우고, 달걀 부화는 물론 메추리알까지 도전하셨으니 매일매일 학교 생활이 즐겁지 아니한가. 


  여름이 한창 익어가던 날, 2호는 풀이 죽어 하교했다. 선생님이 2학기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가신가는 것이다. 

사실 3학년 시작 날부터 선생님은 알림장에 1학기만 맡을 예정이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시간을 맘껏 즐기라고 2호에게 최대한 늦게 말해줄 참이었는데 먼저 터뜨리셨네! 충격 반 서운함 반을 안고 2호는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그리고는 여름방학 동안 불쑥불쑥 바다이야기를 꺼냈다. 

"여름방학 동안 바다에 한 번도 안 간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아, 바다에서 수영하고 싶다."

"우린 대체 왜 바다에 안 가는 거예요?"

사실 2호는 겁이 많다. 바다도 무서워한다.  때아닌 바다 타령에 대꾸 한마디 해줬다.

"어디, 가고 싶은 바다가 있어?"

"네! 제주도요! 바다에서 물놀이도 하고 그러다 보면... 선생님도 만날 수 있잖아요!"

그렇다. 2호의 온 마음은 바다가 아니라 선생님이었다. 


  지루하고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개학 후 선생님과의 애틋한 일주일을 보내고 9월 1일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한여름 밤의 축제 같았던 1학기의 여운이 가시고 일상으로 적응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2호는 선생님이 친절하다는 말 외엔 별다른 말이 없다. 이제 학교는 관성으로 다니는 짬밥이 쌓인 3학년이 된 2호이기에 별다른 걱정도 없다. 가끔 공룡을 그리지만 이젠 다른 영역의 책도 보는 편이고, 오만가지 인상을 쓰지만 토마토 먹기 도전을 했고 계란 반찬이 나올 때마다 동물복지제품이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제주도 대신 서대문 자연사박물관 가자고 한 달을 노래 부르는 탓에 얼마 전 다녀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불을 끄고 굳나잇 인사를 하는 찰나, 2호가 묻는다. 

"엄마, 나 수학경시대회 언제야?"

"아직 날짜는 안 났을 걸. (그리고 그거 경시대회까지는 아닌데)"

"나 경시대회에서 좋은 점수받으면 뭐 해줄 거야?"

"방탈출 카페 가기로 했잖아. 원하는 게 있어? (또, 또 시작이다. 게임 얘기하기만 해 바라)"

"웅. 제주도!"

"너... 선생님 만나게?"

"웅! 우연히 만났다고 하게!"

아직 2호의 마음에는 선생님이 출렁이고 있었다. 

2호의 애틋한 마음이 내게로 왔다. 

난 공감능력 만렙 ENFJ니까. 


제주 해변 어딘가를 걷다 보면 선생님과 우연히 만나서 인사하는 2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한 번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 2호는 게임을 참고, 유튜브를 참고, 스맨파를 참고 연필을 잡는다.  슬그머니 달력의 날짜를 스캔해보지만 도저히 날이 안 나온다. 그러나 어느새 2호를 응원하고 있다. 선생님께 몰래카메라를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왜냐면 난 인류애 솟구치는 ENFJ니까.


정말 나도 우연히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거리에서 뵌 적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친구들과 점심 먹고, 공강 시간에 근처 옷가게를 둘러보다 나왔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인천의 고등학교 선생님을 서울 한복판에서 만난다는 건 상상도 못 했기에 나도 모르게 사회성이 발동하여 격한 반가운 인사를 했다. 선생님도 무척이나 기뻐하며 몇 마디 나눈 걸로 기억이 난다. 그 잠깐 사이 난 얼마나 밝은 미소를 지었던가. 

은사님과의 해후를 뒤로 하고 다음 강의 들어가기에 앞서 화장실에 잠깐 들리고, 난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날 점심에 숯불닭갈비를 먹었었나, 야무지게 볶음밥까지 먹었던 탓인지 앞니에 커다란 고춧가루가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제주도에 가거들랑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꼭 쓰리라.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 2호에게 해주는 나의 조언이다. 


  열 살 인생을 지나오며 여러 번의 이별을 겪은 2호지만 이번 이별은 그리움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2호에게는 이별이 아닐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러 올라오듯.

제주도로 내려가면 다시 만날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우연히라도.


푸른 제주 하늘 아래 단 한 사람만을 그리는 2호의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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