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nder Years
사춘기 키워드는 아끼고 싶었다.
그 혹독하고 잔인했던 시간을 잘 버텨냈노라고, 거창한 무용담을 풀어내며 무언가 나 자신에게 훈장을 주고 싶은 세리머니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그럴 때가 있었지, 너의 마음을 이해한단다'라는 대인배의 자세로 아들의 마음을 품어주는 엄마의 이데아를 꿈꿨다.
그리고 그 시점을 열두 살로 잡았다.
어릴 적 나의 첫 미드, [케빈은 열두 살]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5학년 3반 청개구리들] 책을 읽으며 2반이었던 현실을 비관하기도 했고, 천재소년 두기를 보며 다시 공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나의 열두 살이 있었기에, 열두 살은 내게 특별하게 빛나는 나이이다.
열두 살로부터 한참 벗어나 희미한 숫자로 잊힐 즈음, 영화 한 편이 타임머신 역할을 해주었다.
인사인드아웃.
열두 살 라일리의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 들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스포일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1호가 6세였기 때문이다.
'6년 뒤면, 휘몰아치는 감정의 아지랑이를 온몸으로 느끼는 열두 살의 마법을 함께 나누어보리라~'
그때까지 봉인된 판도라 상자 마냥 절대 열어보지 않으리, 다짐했다. 각종 명절날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도 호들갑 떨며 철저하게 외면하는 사이 여섯 번의 여름이 지나고 1호가 드디어 열두 살이 되었다.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1호와 2호는 나란히 앉아 라일리의 감정 친구들을 영접했다.
6년을 기다린 시간 때문이었을까.
1호가 열두 살이 되었다는 현실 때문이었을까.
영화 시작과 동시에 기쁨이가 춤추고 노래할 때부터 장전된 눈물은 계속 흘러 슬픔이의 어눌한 말투마저 외로워 보이고, 급기야 빙봉과의 마지막 인사에서 오열했다.
Take her to the moon for me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의 열두 살 훨씬 이전에 잊혀진 빙봉에게 아련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던 중 1호와 눈이 마주쳤다.
멀뚱멀뚱.
음.. 이상하다... 쟤 빙봉의 정체를 모르는 건가?
설마, 영화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겠지?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기쁨이가 진정 기쁨을 찾는 여정 속에서 내 머릿속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잔잔한 감정의 물결을 느끼며 영화가 마무리될 때쯤, 숨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쿠키영상에서 버스기사의 머릿속에 버럭이 5명이 있었다. 둘이 깔깔거리며 웃더니 다 끝나고 다시 보자고 했다. 오, 이 녀석들. 뭔가 감동을 느꼈나 보군!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지, 어느 부분이 좋았어?"
"아까 버스기사 아저씨, 하하하하.. 그 부분 다시 보고 싶어."
"......"
5명의 버럭이가 요동치는 장면을 세 번 연속 보고 나서야 1호와 2호는 영화가 재미있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그러니 나 혼자 거실에 남았다.
'왜 나는 6년을 기다린 거지?'
눈물 맺힌 채로 미친 듯이 혼자 웃고 긴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었다.
열세 살이 된 1호는 여전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다. 2호와 여전히 공으로 하나가 되어 놀고,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고, 잠자기 전 더 놀지 못했다고 한탄스러워한다.
사춘기 복병은 2호에게서 터졌다.
4월 코로나가 피크로 치닫고 있을 때, 1호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했으나 슬픈 예감은 늘 그렇듯, 1호는 코로나 판정을 받았다. 조심했음에도 나와 신랑도 확진자 반열에 올랐다.
문제는 우리의 2호.
1호 확진 후 이틀을 나와 함께 잤지만 2호는 무사했다. 잠복기 지나고 증상이 올 때가 됐다 싶었지만 끝내 2호는 홀로 비감염자라는 긴 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열 살 2호는 안방을 독차지하고 하루 24시간, 7일을 혼자 지냈다. 학교도 못 가고 온전히 독방 생활을 하며 1호와 줌을 통해 간간히 수다 떨 뿐,
'자거나, 먹거나, 유튜브 보거나'의 루틴을 강요받았다.
일주일 후, 온 가족이 격리 해제의 기쁨을 누릴 때 2호는 하나도 기뻐하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 말수가 줄어들고, 감정이 절제되고, 의욕도 사라진 2호는 까칠이와 버럭이의 조종을 받았다.
"너 너무 유튜브 많이 보는 거 아니니."
"그럼 제가 뭘 더 하겠어요~.'
"받아쓰기 시험 본다는 데 준비는 했어?"
"아니요~"
"밥 먹자~ 식탁으로 나오세요~"
"하아. 먹고 싶은 게 없네."
사는 게 아무런 재미가 없다는 2호는 5월 어린이날 선물에도 시큰둥했고, 핸드폰에만 마음을 뺏겨 살았다. 그러던 중 계속된 주의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2호는 내 눈을 피해 하루에 2시간 넘도록 짬짬이, 아주 부지런하게 게임라이프를 즐기다 걸리고 말았다.
2호는 의외로 덤덤하게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없이, 핸드폰을 뺏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라는 초연한 자세로 날 바라봤다.
한참의 침묵 후 말문을 열었다.
"2호야, 엄마가 곰곰이 생각해봤어. 엄마한테 얘기도 잘해주고 항상 밝은 목소리로 인사도 잘해주는 우리 2호가 언제부터인가 좀 변한 거 같아서. 왜일까, 왜일까 생각했는데... 그때 기억나지? 가족 모두 코로나 걸렸을 때 2호 혼자서 7일이나 혼자 자고 혼자 밥 먹고, 혼자 놀고. 그때 정말 2호 힘들었을 거 같아. 다른 가족은 거실도 왔다 갔다 하는데 마음대로 방을 나오지도 못하고, 외롭고 심심했지?"
2호가 가만히 고객을 끄덕였다.
"혼자 외톨이 같고, 가족과 멀어진 거 같고 그랬을 거 같네... 2호가 그런 기분인 거 생각을 못했어. 그냥 잘 있어줘서 고맙다고만 생각했거든. 이제 생각해보니 2호가 일주일간 너무 마음이 슬펐을 거 같아. 미안해. 외롭고 심심하니까 게임 생각이 더 나고 그랬었지? 한 번 하니까 계속하고 싶고. 그래. 사람 마음이 그래..."
말을 할수록 왠지 더 미안해져서 더 이상 말을 못 했다.
긴 침묵이 흐르고 2호를 안았다.
2호도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엄마 죄송해요를 연신 뱉어냈다.
'괜찮아, 괜찮아. 너도 모르고, 엄마도 몰랐어. 혹시 모를 잔여 바이러스로 옮길까 봐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서로가 눌러왔던 슬픔이를 건져내어 마주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2호는 조금씩 자기 색을 찾아갔다. 잘 때 꼭 손을 잡고 자고, TV 볼 때면 발 하나를 내 다리에 비벼대고, 가끔 백허그 서비스도 해준다. 받아쓰기 실력도 늘었다! 게임 시간도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가끔 앱 사용시간을 체크한다)
그사이 훌쩍 커버려서, 이젠 정말 열 살 같은 2호. 곧 2호도 열두 살을 맞이하는 날이 오겠지. 진짜 열두 살.
너의 열두 살을 기대할게!
"엄마, 사춘기는 언제 와?"
어느 날 밤. 1호가 문득 물었다.
"글쎄. 엄마도 모르겠는데, 곧 올 거야. 그럼 엄마랑 얘기하는 것도 귀찮을 수 있고, 따로 자고 싶어 할 거고, 혼자 있거나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몸에도 변화가 오겠지? 아. 1호 목소리부터 변하겠다.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고 서서히 그렇게 될 거 같아."
"음... 엄마 그럼, 나 사춘기 지나고 다시 엄마랑 같이 자도 돼?"
"으응...?" 뭐시라.
1호와 2호의 열두 살이 동시에 올 수도 있겠다 싶다.
까칠이 대 까칠이냐, 버럭이 대 버럭이냐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나의 갱년기가 먼저 올 수 도 있으니 준비들 하시라.
우연히 [케빈은 열두 살] 오프닝 영상을 보다가 원제가 [The Wonder Years]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맙소사. 이렇게 멋진 제목을 이제야 알다니.
오늘 하루도 1호, 2호와 경이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