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생활탐구보고서] - ⑤ 학원
너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엄마, 학원은 좀 이해가 안가."
덜컥.
사교육을 일부러 멀리 한 건 아니었으나 매번 1호의 반대에 부딪혀 미루고 미루다 5학년 11월, 동생 친구들 따라 영어학원 상담 갔다가 엉겁결에 등록하고 한 달 다닌 후에 나온 말이었다.
역시나 수업내용을 못 따라가는 건가. 선생님 설명이 어렵다는 걸까. 이다지도 기관 부적응자란 말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참았다.
"아... 어떤 게 이해가 안가?"
"여기 성적표래."하고 툭 내미는 봉투에는 이번 분기 파이널 테스트 결과지가 담겨 있었다.
여기 학원은, 3개월마다 한 교재에 대해 배우고 테스트 결과가 다음 분기의 반편성에 영향을 준다. 높은 점수를 받으면 레벨 업을 해서 윗반으로 올라가고, 아니면 현재 반에 남아서 같은 수준의 다른 교재를 통해 실력을 다지는, 그런 시스템이다. 상담 때 익히 들었던 내용이라 테스트 결과지를 앞에 두고 나도 순간 긴장이 되었다. 1호는 아직 한 달이 채 안 되는 상황에서 테스트 보는 거라 다음 분기 반편성에서 열외가 된다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봉투를 여는 손은 조금 떨렸다. 학교 밖 시험은 처음이기에.
"오늘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테스트에서 잘 보면 레벨업을 한대."
"어, 엄마도 들었어. 근데 이번엔 괜찮아~ 넌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결과에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근데, 엄마. 이해가 안 되는 게, 학원에는 배우러 가는 건데 왜 테스트가 있고 레벨업을 해야 하고, 왜 그런 제도가 있는 거야?"
으응...?
'아... 그렇지. 너는 그런 시스템인 줄 몰랐지.
온전히 엄마만 원장님과 상담하고 평가 시스템을 듣고, 동의의 표시로 등록하고 학원비를 결제했을 뿐, 그 과정에서 네가 학원의 제도권 안에 들어간다는 건 설명을 못했지.'
순수하게 배우러 갔을 뿐인데, 왜 학원이 나를 평가하는지에 묻는 1호에게 명쾌히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거시적으로 학교 입학과 동시에 (요즘엔 우스갯소리로 산후조리원부터라는...) 입시 경쟁 레이스에 아이들은 놓인다. 앞으로 전개될 빡빡하면서도 긴 레이스를 달리기 전에, 초등 때는 아이가 학교 생활을 조금은 여유롭게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서로 암묵적으로 학원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은 놀아야 하니까!
그렇다고 거하게 놀지도 못했지만 소소하게 그날그날 땀 흘리고 놀았던 날들을 뒤로하고, 첫 영어 학원을 등록한 후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가고 싶어도 입반이 안 되는 학원들이 있다는 것이다. 수학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과외를 하는 아이들이 있고, 웬만한 영어 실력이 아니고서야 레벨 테스트의 기회조차 안주는 곳도 있다니. 이걸 문화적 충격이라 해야 하나, 교육적 충격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나의 무지의 소치인 건가 혼란의 시간이 왔다.
뭔가 그래도 내 딴엔, 유년시기에 아이와 반짝반짝 빛나는 날들을 만들어 갔다고 생각했었는데, 학원의 평가 시스템 앞에서 나는 교육적으로 방목과 방치의 중간을 달리는 엄마였다. 이유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 휘몰아치던 감정의 혼란을 이제 1호가 느끼고 있는데, 나도 무방비 상태로 아이와 함께 소용돌이 안에 들어가고 있는 꼴이라니...
어쩌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일주일이 지나갔고 1호가 말했다.
"엄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 친구들이 다 잘해."
괜찮다, 다독이고 꼭 안아주었다. 내가 해줄 건 이제 안아 주는 것뿐.
테스트를 했다고 달라질 건 없고 학원은 배우러 가는 곳이 맞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몰랐던 게 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게 시험이라고.
1호는 학원 시스템이 여전히 이해는 안 되지만 본인의 할 일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테스트 결과가 어떻든, 수업에 시간에 집중하고, 숙제하기.
그리고, 새로 발견한 '학원의 좋은 점'을 알려주었다. 수업태도가 좋거나 숙제를 해갔을 때 스탬프를 받을 수 있다는 것. 1호는 스탬프 모으는 재미로 학원의 의미를 찾아갔다.
한 편, 형아 덕? 에 일찍 학원 맛을 알게 된 2호는 본인의 파이널 테스트 결과는 왜 아직 나오지 않냐고 도리어 나를 닦달했다. 내가 주는 게 아니다, 네가 학원에서 받아와야 엄마도 알 수 있다,를 며칠 반복하고 나서야 테스트 결과 봉투가 도착했고 2호는 의기양양해하며 읽어 달라고 했다.
저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 무엇.
1호는 스탬프를 차곡차곡 모았다.
2호는 스탬프가 80개가 되면 문화상품권으로 바꿔와 게임 아이템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스탬프 종이가 쌓이고, 문화상품권이 쌓이고, 계절이 바뀌고 새해가 되었다.
1호는 더 이상 학원 시스템에 대한 질문을 안 한다.
학원에 적응 잘하고 수업 잘 따라가 주길 원했던 처음의 내 생각대로, 바람대로 잘 다니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슴 한 구석이... 서운하다.
이제 더 이상 제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품지 않을까 봐.
한 발 물러나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없을까 봐.
어쩌라고.
이제 막 13살이 된 아이에게 난 무얼 이리 바라는 거야.
3개월이 지났고, 아이들은 두 번째 파이널 테스트를 보았다.
1호는 레벨업을 했고, 큰소리치던 2호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하나는 여전히 스탬프를 쌓고 있고, 다른 하나는 채워지기 무섭게 새로 시작하고 있다.
이쯤에서 나는 2호에게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귀뚱으로 듣고 가는 2호 뒷모습이 보인다.
있잖아, 1호. 2호야.
토끼랑 거북이랑 달린 거리는 똑같은 거 알아?
쉼 없이 제 속도로 달려가도 되고,
맛있는 열매도 먹고, 꽃향기도 맡고, 하늘 보고 누워 도 돼.
끝까지 완주한 토끼랑 거북이, 모두 잘한거거든.
앞으로.. 계속 타야 할 언덕이 있고, 경사는 더 가파를꺼야.
각자의 방식대로.
완주하길.
응원해.
쉼터가 되어주고 싶은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