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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Feb 01. 2016

#064. 세기의 매치

어느 한 분야의 마스터가 된다는 것의 의미.




01.


1972년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대결 하나가 열렸다. 구 소련의 "보리스 스파스키"(리브 슈라이버 역)라는 세계 최고의 체스 황제에게 도전장을 던진 15세 최연소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 보유자 "바비 피셔"(토비 맥과이어 역), 그는 미국인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에 이목이 집중된 것은 이 경기가 단순히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체스계에 두 번 다시 없을 역사적인 대결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자유주의 체제와 공산중의 체제를 대표하는 두 국가가 끊임없는 경쟁 구도를 이어나가며 서로를 견제하던 냉전(Cold War)의 시기와 맞물려 양국은 이 게임을 통해서 서로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영화 <세기의 매치>를 연출한 감독 "에드워드 즈윅"은 그런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비운의 천재 "바비 피셔"의 모습을 조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 시대를 대립하던 양측의 분열과 집단의 맹목적인 모습, 그리고 개인의 아픔까지 그려내고자 한다.


02.


영화는 전체적인 홍보의 방향이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비 피셔"와 "보리스 스파스키", 두 인물의 마지막 대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체스' 종목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자, 냉전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되어진 인물 "바비 피셔"의 전기적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영화 <셀마>(2014)에서 "마틴 루터 킹"의 수 많은 업적들 중 '몽고 메리 행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것처럼 이 작품 <세기의 매치> 역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레이캬비크 매치'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어린 "바비 피셔"가 체스에 입문하는 과정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언급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03.


앞서 언급했듯이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냉전의 광기에 사로잡힌 두 나라의 모습을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체스'라는 도구가 되는 것인데, 만약 이 한 가지만이 작품 속에서 어떤 대결 구도로서 작용하게 되었다면 정말 재미없는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영화 <세기의 매치>는 배경에 놓인 냉전 시대의 대결 뿐만이 아니라 순수한 승부에 대한 갈망과 정치 논리의 대결, 동적인 사고와 정적인 사고의 대결 등의 요소들을 이 작은 체스판 위에 모두 표현해내면서 영화의 중심이 되는 "바비 피셔"라는 인물의 내적인 면모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인 요소들을 모두 아울러 표현하고자 한다.


04.


많은 사람들이 "바비 피셔"라는 인물에 대해 '우주(Galaxy)의 수'로 표현될 수 있을만큼 다양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체스'에 미쳐버렸기 때문에 편집증적인 모습과 정신불안적 면모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사실 조금 다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벌어오는 돈을 써가며 다른 남자와 놀아났고, 하나 밖에 없던 피붙이 누나 역시 그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이라고는 고속도로 옆 허름한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콜걸이 전부였고,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육체적으로 먼저 어른이 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의 그런 정신적 질환들이 애초에 그가 갖고 있던 일종의 '애정결핍'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마음으로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유명세를 타고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언론과 세상의 관심이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과도한 요구를 해 가면서까지 대우를 받고자 했던 것도 같은 연장선 상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 넓은 세상에 유일하게 마음을 둘 수 있는 곳이 '체스'였으며, 그런 이유로 '체스'를 시작하게 된 것 자체 부터가 그에게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05.


애초에 "바비 피셔"가 체스판 밖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들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본다면, 이 영화에서 의외로 눈길이 가는 인물들이 있다. 그의 곁에서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두 인물, 변호사 "폴 마샬"(마이클 스털버그 역)과 신부 "빌 롬바디"(피터 사스가드 역)다. 두 사람은 "바비 피셔"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인물들이지만 내적인 성향까지도 동일하지만은 않다. "폴 마샬"이 "바비 피셔"를 자신이 갖고 있는 애국심과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빌 롬바디"는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어떤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지에 더욱 관심이 있다. 일종의 호기심인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바비 피셔"가 연승을 거듭해 나가면서 약간의 정신적 문제를 보이기 시작할 때,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폴 마샬"과 멈추어야 한다는 "빌 롬바디"는 그의 미래를 놓고 잠시 부딪히게 된다. 결론적으로는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빌 롬바디"가 "폴 마샬"에게 설득 당하게 되어, 두 사람은 내심 결과를 알면서도 그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과연 두 사람은 "바비 피셔"라는 인물에게 '든든한 조력자'였을까?


06.


영화는 '체스'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체스'에 대해 관객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는 '체스'에 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관객들(국내 관객 뿐만이 아니라)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되는데, 어쨌든 역사의 결과에 따라 "바비 피셔"는 '레이캬비크 매치'에서 자신의 적수 "보리스 스파스키"를 꺾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24번의 매치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매치로 손꼽힌다는 6번째 대결(영화 속의 마지막 대결)에서 "보리스 스파스키"가 "바비 피셔"의 창의적인 수를 두고 찬사의 박수를 보내는 장면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장면을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방향은 "바비 피셔"가 원하는대로 장소까지 바꿔가며 그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던 "보리스 스파스키"가 그의 플레잉에 매료되었다는 해석에서 시작된다.


결국 어떤 분야에 통달하여 마스터(Master)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자신을 시기하여 그 업적을 무너뜨리고, 능력을 폄하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매료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뛰어난 분야의 것을 그 목적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음을 타인에게 전달 할 수 있는 능력이자, 상대를 가르치겠다는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의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전이시켜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경지.


그리고 "바비 피셔"는 분명히 그 경지에 이르러 있었을 것 같다.


07.


이 부분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이기는 하나, 앞서 4번에서 언급한 "바비 피셔"의 내면과 관련해서 그 의미의 그림자가 더욱 진하게 남는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 말이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바비 피셔"의 실제 모습이 등장하며 그의 이후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설명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론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미디어의 속성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영화 속에서 계속 등장하던 파파라치 컷과 결부하여 시대에 이용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겠지만 말이다.


08.


이 영화의 원제는 <Pawn Sacrifice>이다. 체스판 위의 말 중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존재(겉으로 보기에..), 장기로 따지자면 '졸(卒)'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국내 타이틀보다는 원제의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온다. 냉전 상황 속에서 집단의 요구를 홀로 받아내야만 했던, 누군가에 의한 불순한 의도가 깔린 체스판 위에서 자신만의 순박한 체스를 이어나가고자 했던 "바비 피셔"의 모습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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