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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Feb 16. 2016

#065. 캐롤

당신만 내게 웃어준다면 나는 행복해.




00.


동성애를 다룬 작품(퀴어 영화)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개인적인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비자의적 편견 혹은 이해의 부족이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들을 더해갈수록 관련 자료 및 실제 경험담을 통한 이해의 폭 역시 함께 가져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스스로는 '동성애'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들의 정체성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지지할 의사도 없다. 그냥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다른 연인들의 모습 그대로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나는 나의 사랑을 서로의 존중 속에서 키워나가고 싶다. 다만 내가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의 오해와 간극을 줄이고자 하는 작은 배려 정도로 해 두고 싶다.


1) 이 부분과 관련된 개인적인 생각들은 지난글 <버텨내는 일의 가치에 대하여>를 통해 다소 풀어낸 바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참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01.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2006)이 개봉했을 때 기억이 난다. 지금은 "이안" 감독의 작품들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고,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져"의 연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바뀐 부분들이 많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바라보던 키워드는 딱 한 가지였다. 두 남자의 동성애. 20살이었던 나 역시 이 작품을 보고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 역시 충격적이었던 시대. 그 때만 해도 "제이크 질렌할"은 커녕 그 유명한 "히스 레져"조차 국내 관객들에게는 잘 모르는 배우 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도 같다. 정확히 10년 만에 동일 사회 속에서 어떤 하나의 개념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 속 소재로 이용되어 온 "동성애"에 대한 관객들은 반응은 그만큼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관객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재상영을 기다린다.


2)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은 지난 2006년 국내에서 개봉한 작품으로, "이안" 감독이 연출하고,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져"가 주연을 맡았던 퀴어 영화다. 이 작품을 통해 부부를 연기했던 "히스 레져"와 "미쉘 윌리엄스"는 실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2008년 <다크 나이트>에서 희대의 캐릭터 "조커"를 연기했던 "히스 레져"는 이 작품이 개봉하기도 전인 2008년 1월 22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02.


처음부터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보편적인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지금 이야기 하려는 영화 <캐롤>은 분명히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작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비해 심리적인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온전히 "토드 헤인즈" 감독의 표현 방법 덕분이다. 그 동안 수 많은 동성애 영화들은, 특히 "김조광수" 감독으로 대표되는 한국형 작품들은, 상당히 투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거짓없이 표현하였고, 사회의 인정에 대한 욕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듯 했다. 물론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관객들이 느끼는 불편함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03.


해외 작품들의 해석에는 단순히 국내 정서로만 파고들기 보다는 국내외 사정의 편차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이런 부분들을 영리하게 피해 나간다.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에서 인정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애초에 대중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두 개념의 간극을 해소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동성, 이성 누구와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좋아하는 이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또 선물하고자 하는 가장 일상적인 표현들의 집합체라는 설명으로 말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두 주인공 "캐롤"(케이트 블란쳇 역)과 "테레즈"(루니 마라 역)가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대한 표현들은 거의 드러나고 있지 않다. 대신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지, 어떤 과정을 통해 마음을 주고 받게 되는 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중요하게 표현되고 있다.


04.


결국 감독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여전히 동성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랑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의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을 향해 정면 도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는 실제로 이런 모습들이 "테레즈"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려지고 있다. 특히 '동성'의 연애를 묻는 "테레즈"에게 그의 남자친구는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테레즈"에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편지를 남긴 "캐롤"의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다. 영화 <캐롤>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데는 이런 이야기들이 함께 그려지고 있는 부분들 역시 큰 몫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토드 헤인즈" 감독은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님을, 다른 사랑이 그러하듯이 그들 또한 그들 앞에 놓은 현실과 그 벽을 직시하고 흔들리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런 부분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들에 뜨거운 일갈을 퍼붓는다.


05.


앞서 3번과 4번에서 언급한 부분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토드 헤인즈" 감독의 전작인 <파 프롬 헤븐>(2002)을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기를 권한다.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싸 들고 사무실을 향한 "케이시"(줄리안 무어 역)의 앞에는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 역)가 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는 "프랭크"의 모습을 두고 물론 "케이시"는 그런 그가 미쳤다고 생각할 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남녀의 역할만 반대일 뿐, <캐롤>의 "캐롤"과 "하지" 부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파 프롬 헤븐>에서 감독은 "프랭크"에게 행동 수정이라는 미션을 주었다. '정상적인' 남성성을 찾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받기로 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은연중에 이성 간의 사랑만이 '정상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거리가 16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시나리오 상의 해석 차이에서 기인한 것인지, "토드 헤인즈" 감독의 내면적 시각의 변화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두 작품을 함께 고민해 보는 과정은 또 다른 재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3) 영화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은 "줄리안 무어"와 "데니스 퀘이드"가 출연한 "토드 헤인즈" 감독의 2002년 연출작이다.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이 영화 <캐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50년 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조금의 과장도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06.


퀴어 장르의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달리 "캐롤"이라는 인물에게는 내면적 갈등에 따른 변수들 외에 또 다른 외적인 변수가 한 가지 더 존재한다. 그녀의 아이 "린디"의 존재다. 이는 "캐롤"이라는 인물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며, 오롯이 자신의 감정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모성애가 강하게 그려지고 있는 "캐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물들, 특히 가정이 있는 "에니스"가 갖는 책임감과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알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캐롤"과 <브로크백 마운틴> 속 두 남자의 이야기는 동일선 상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지켜야 하는 가정이 존재하는 "에니스"(히스 레저 역)와의 비교에 있어서도 성별의 차이에 따라 주어지는 책임감, 그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다르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1950년대의 배경을 취하고 있는 것이고, 이 영화가 동성애라는 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성(姓)'이라는 단어가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07.


사실 "캐롤"의 자녀인 "린디"의 존재는 의외로 두 사람, "캐롤"과 "테레즈" 사이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니 다르게 이야기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의미있는 변화를 맞이할 때마다 모든 지점에 "린디"가 함께하고 있다. 일단 두 사람이 만나고("린디"의 선물을 사기 위해 그녀는 백화점을 방문하게 된다.) 헤어지게 되는 계기 모두에 "린디"가 존재한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일부 시각들은 인형과 기차 선물이 서로에게 접근하기 위한 단순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린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테레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캐롤"의 마음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남편인 "하지"가 딸의 양육권을 놓고 협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남편 앞에서 당당하기만 했던 "캐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녀가 두려웠던 건 자신이 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하여금 딸이 잃게 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이미 "애비"(사라 폴슨 역)와의 사랑으로 자신의 딸에게서 온전한 가정을 빼앗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이 역시 앞서 말한 외부적 변수에 따른 흔들림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08.


이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한다. 이 영화의 타이틀이 "캐롤"이라고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캐롤"과 "테레즈" 두 사람, 누구의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하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캐롤"에게는 이미 세상의 편견과 가정의 억압으로 균열이 시작되어 버린 자신의 세계를 다시 한 번 무너뜨리더라도 진실된 마음을 다시 한 번 꺼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다. 반대로 "테레즈"에게는 그 동안 그녀도 몰랐던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벽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선택을 오롯이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문제다. 자세히 보면 "캐롤"을 만나기 전까지 "테레즈"의 모습은 실제로 자신의 삶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다. 그리고 두 번의 사랑 뒤에 이별을 말하는 "캐롤"의 모습에 대한 해석은 두 사람 중 어떤 이의 편에서 지켜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장면이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의 시선에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09.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은 수면 아래에 가려져 있고, 때문에 영화는 그리 치열하게 그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번의 배드신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세히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표면 그대로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벗어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심리적인 문제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베드신의 장면에 더욱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테레즈"라는 인물이 그 동안 의문을 갖고 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한 답이 해소되는 장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레즈"가 "캐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두 사람이 첫 대사를 나누기 전, 손님을 응대하는 동안 잠시 시야에서 벗어난 그녀를 찾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때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상태의 호감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확인해 나가는, "캐롤"이라는 대상을 마주해 나가는 시간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그녀의 첫 번째 베드신은 당연하게도 그런 모든 의구심들을 해소하는 순간인 것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10.


영화의 도입부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던 "테레즈"의 시선과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 후반부에서 앞서와 비슷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캐롤"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두 장면에 차이가 있다면 "테레즈"가 무엇을 바라보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과 반대로, "캐롤"의 눈 앞에는 헤어진 "테레즈"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그렇다면 "캐롤"을 바라보던 "테레즈"와 대비되는 "테레즈"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나타난 남자 때문에 "캐롤"이 먼저 자리를 뜬 것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그녀의 눈 앞에 보여졌던 인물이 바로 "캐롤"이기를 바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마음이 바로 멜로 장르에 대한 어떤 환타지 같은 것이 아닐까?


11.


장르적인 한계와 여전히 남아 있을 소재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의외로 서정적이고 단순했던 영화의 흐름에 비해 큰 울림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 이유가 바로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테레즈"라는 대상의 시선이자, 관객들의 시선)를 향해 유약하지만 환희에 찬 미소를 짓던 "캐롤"의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던지는 이 미소는 영화 <캐롤>의 전부라 해도 거짓이 아니다. 동성애가 무엇인 지 모르더라도, 50년대에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사랑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 지 모르더라도, 아니 심지어 이 영화가 무얼 이야기 하려는 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단 하나만큼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긍정의 신호를 보낼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 혹은 나의 구애에 뜨거운 미소로 화답하는 상대방의 모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환희 같은 것 말이다.


12.


만약 누군가와 대면하여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두 사람의 사랑과 그들이 둘러싸인 상황들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서라도 역시 사랑이라는 것은 견디고 또 견뎌낸 뒤에야 얻을 수 있는 당신의 미소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나는 공감이 이 영화 <캐롤>의 사랑이 '이런 사랑도 세상에 존재해'의 시선이 아니라, '이것도 그냥 하나의 사랑이야..' 라고 느끼게 만든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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