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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Feb 25. 2016

#067. 귀향

아픔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01.


열여섯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강제 동원되어 종전 직전 '소각 명령'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셨다는 "강일출 할머님". 지난 2001년 '나눔의 집'에서 할머님께서 직접 그리셨다는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에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을 위한 공연을 시작했던 "조정래" 감독이 이 그림을 만나게 되었고, 이 그림 속에 담겨 있던 열여섯 소녀의 아픔과 고통의 시간들을 영상에 담아내기로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14년의 세월 동안 이 작품에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은 커녕 세상의 냉대를 받으며 프로젝트가 무산되기를 수어 번, 지난 2013년 여름에서야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어렵사리 진행할 수 있었다.


1) 실제로는 크라우드 펀딩 뿐만 아니라 ARS 후원, 계좌 후원, 스토리 펀딩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총 75,270명의 시민들에게 후원을 받았으며, 순 제작비의 50%가 넘는 약 12억여 원 정도가 조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힘을 모아 준 시민들의 이름은 한 명의 누락도 없이 영화의 10여 분에 달하는 엔딩 크레딧으로 삽입되었다.


[그림] 태워지는 소녀들 - 강일춘 할머님 작품.


02.


이 작품 <귀향>은 영화가 차용하고 있는 '위안부'라는 소재의 특성 상 태생적으로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물론 전체적인 연출 방향은 기존의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극의 형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조정래" 감독이 애초에 이 작품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삶과 고통의 시간들을 영상에 담아 '문화적 증거물'로 남기고 싶었다고 하니, 다큐멘터리 장르가 가지는 시대성과 현실성의 전달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자면, 장르 상으로는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경계선에 놓인 작품이라 할 것이며, 더욱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다큐멘터리의 시선으로 각색한 영화"로 설명할 수 있겠다.


03.


이 작품을 표현하면서 "다큐멘터리의 시선으로 각색한 영화"라고 설명한 것은 바로 이전에 흥행해 왔던 동류의 작품들, <워낭소리>(2009),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춘희막이>(2015)와는 또 다른 지점에 이 영화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영화관의 스크린을 통해 영사되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영화의 범주보다는 다큐멘터리의 그것에 더욱 가까운 작품들이었다. 다만 이 작품 <귀향>의 소재 자체가 관객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는 것과 그 동안 몇 편의 다큐멘터리들을 잘 연출했던 "조정래" 감독의 시각이 너무나 사실적이라는 점이 이 작품을 자꾸만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 밀어넣는 것처럼 느끼게끔 한다.


04.


이 작품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 "위안부"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연출 상의 약점이 된다. 이 작품이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와 동일하게 상업 영화의 소재로 지나치게 무거운 부분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하나. 그리고 결국 영상으로 표현되는 수위의 차이일 뿐 그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 관객들 모두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실들이라는 점이 또 하나. 다행인 것은 그렇다고 해서 감독이 이 핸디캡들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려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했듯이 이 작품이 흥행하는 것은 부수적인 부분일 뿐, 그 목적 자체는 어렴풋이 상상 속에서만 그려보았을 그 지옥같은 시간들을 있는 사실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05.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시점(時點)을 활용하며 진행된다. "영옥"(손숙 역)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현재의 시점과, "정민"(강하나 역)의 이야기가 보여지는 과거의 시점을 연결시켜 놓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방법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화해시키기 위한 메시지'라는 식의 보편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나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이 작품의 이야기들을 두고 '화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이러한 방법이 현재 살아 계시는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세월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아픔이 쉬이 덜어질 수는 없겠지만, 스크린 가득히 그 모진 시간을 간직하고 계실 당사자 분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받는 것은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또 할머님들의 입장에서도 또 다른 아픔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06.


또한 감독의 이러한 방법은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놓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숨바꼭질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그네들의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계'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그 곳에서 함께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의 단초가 되며 현실 속에 남겨진 할머님들의 심정에까지 맞닿게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들이 상상하기도 힘들 그 가혹한 시간들을 버티고 또 버텨낼 수 있었던 것 역시 "미래에 대한 희망"과 함께 "서로가 느꼈을 작은 관계"가 그 작은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이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지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작품 속 모티브가 되는 대상 그 자체와의 교감 또한 잊지 않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괴불노리개' 역시 현재와 과거를 잇는, 그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07.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위안부 소녀들의 물놀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호흡을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일본군에게 당해야 했던 수치스럽고도 모진 시간들 속에 주어진 잠시간의 여유가 그려졌던 이 장면. 이 순간의 해갈(解渴)은 당사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관객들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이 장면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한 번, 그 이후에 다시 또 한 번, 그 잔혹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현실 앞에서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삶을 이어내 가려는 모습들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욱 아픈 것이다.


2) 실제로 영화의 내용적인 부분들은 수위의 차이일 뿐 대부분 관객들이 인지하고 있는 상황들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이 장면으로 한 번 쉬어주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심각한 피로도를 호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장면 역시 앞서 이야기 했던 '관계'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시선들이 담겨 있다.


08.


이 영화가 15세 관람가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영화는 충분히 아플만큼 직설적이다. 이 역시 가공된 미디어(영화)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 동안 교과서에서만 어렴풋이 배워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시간들이 죄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누군가의 아픔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겉으로만 아는 체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겁한 일이었는 지 스스로 깨닫게 될 만큼 그 순간의 시간들을 지켜보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 특히 일본군에게 유린 당하고 있는 위안소 내부의 모습을 부감(High Angle Shot)으로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부분은 내가 평생동안 보아왔을 그 수 많은 작품들 중 가장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것만 같다.


09.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등장하는 마지막 귀양굿 장면에는 여전히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영옥"을 바라보는 일본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면 이 찰나의 순간이 "조정래" 감독이 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년 이상이 흐른 역사 속의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할머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소리치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 어떤 영화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꼭 봐야만 하는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동안  수 백억원이 투자된 작품들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 역시 분명히 외적으로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토록 사실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해내야 하는 몫은 모두 해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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