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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May 20. 2016

#077. 나의 소녀시대

행운의 편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사람들에게.




01.


2012년 여름,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2)를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난다. 그 당시에도 캐나다에서 막 돌아와 일산에서 머물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굳이 건대입구까지 찾아가서 이 작품을 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건대 롯데시네마의 경우 지금 잠실 제2롯데월드의 롯데시네마가 개관하기 전 롯데가 대부분의 배급 작품들을 공개하는데 이용했던 곳이라 내게 익숙한 곳이었다. 아무튼, 그 날은 정말 더웠던 날이라 스타시티 1층의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라떼를 손에 양껏 들고 영화관에 자리했던 기억도 난다. 갑자기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낸 건 이 영화 <나의 소녀시대>가 끝나자마자 든 생각이 바로 그 동안 내 감수성이 굉장히 무뎌진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당황했다. 그 당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보며 터지기 직전의 망울진 감정들을 한껏 안고 나왔던 것과 달리, 이번엔 너무나 무덤덤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듣기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들에겐 아주 중요하다.


02.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무턱대고 마음에 와닿지 않은 영화는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들이 분명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이별을 암시하는 교내 옥상 장면과 마지막 엔딩의 재회 장면은 그것이 작위적인 연출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발을 굴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 <나의 소녀시대>를 더 자세히 이야기 하기 전에 최근 '대만'에서 쏟아지고 있는 작품들을 조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만 영화 중에서 국내에 가장 알려져 있는 작품은 "주걸륜"이 출연해 인기를 얻었던 <말할 수 없는 비밀>. 하지만 이 외에도 2000년대 후반부터 '대만'에서는 20살 전후의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성장 영화 혹은 청춘 멜로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청설>,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별이 빛나는 밤>, <러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등의 작품들이 대표적인데, 2000년대 초중반 반짝 인기를 얻었던 일본 멜로 작품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느낌이 강하다. 다만 '일본' 작품들이 다소 잔잔하면서도 깊이 있는 멜로를 보여주었다면, '대만'이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은 편이며 슬픈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해학적으로 풀어나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03.


물론 이 작품 역시 그런 '대만' 작품만의 분위기를 전혀 놓지 않고 있는 전형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앞으로 등장한 주요 인물들을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차례대로 설명해 나가는 방식은 '대만'의 청춘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가장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밝은 편에 속한다. 주요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린전신"(송운화 역)과 "쉬타이위"(왕대륙 역), 그들의 이야기에 파생되는 "오우양"(이옥새 역), "타오민민"(간정예 역)이 만들어 내는 청춘 로맨스만의 애틋함도 살아있지만, 어딘가 조금 모자란듯한 여주인공과 항상 과한 에너지를 내뿜는, 소위 '병맛'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를 통해 시종일관 웃음을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알려져 있던 비슷한 종류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대만 영화 특유의 발랄함과 "쉬타이위"의 장난스러움은 동일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이 작품에 큰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언급한 이유는 이 작품 <나의 소녀시대>가 지극히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과 '여운을 즐길만한 공간'을 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의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를 차용하여 전체적으로 밝고 빠른 전개를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클라이막스 혹은 엔딩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의도적으로 흔들 전략을 갖고 있었다면,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그 의도적 장치에 몰입하고 여운을 느낄만한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평균적으로 멜로, 로맨스 영화에서 이 여운은 10-15초 정도의 범위에서 OST를 이용하여 마련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전혀 배려되지 않아 극의 흐름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특히 후반부에서 두어번 등장하는 "린전신"과 "쉬타이위"의 애틋한 장면들은 분명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05.


전체적인 극의 흐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청춘 멜로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멜로'라는 장르 자체가 대체적으로 큰 틀에서는 구조화 되어 있는 공식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작품을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여 다 함께 힘을 합치는 장면도, 떠난 "쉬타이위"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오우양"이 대신 전해주는 이야기의 그것도, 오랜 시간을 떠나 있던 주인공이 성공하여 갑자기 나타나는 장면의 엔딩까지도 모두 말이다. 글쎄 이런 장면들의 집합이 대만 현지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비춰질 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일정 수준 이상 소비하는 국내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굳이 하나만 언급하자면, 이 영화의 어떤 순간에서 순간적으로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가 떠오른 것이 다분히 개인적인 연결고리 때문일까 하는 것이다.


왜 "린전신"은 학교의 모든 일들을 책임지는 캐릭터가 되어야만 했을까?


06.


다른 대만 작품들과 비교까지 해가며 너무 고약하게 이야기 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관람한 관객들의 입에서 괜찮은 소문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지나 온 과거'라는 소스는 충분히 매력적인가 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만 같은 그 소소한 문제들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일처럼 받아들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면서 우리는 나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과거 속에서 정확한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시간들을 대신해 그들만큼은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자신 앞에 놓여진 행운의 편지 한 통에 머리를 쥐어뜯는 "린전신"의 모습이야 말로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아닐까? 행운의 편지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우리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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