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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09. 2015

#016. 스틸 앨리스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Title : Still Alice
Director : Richard Glatzer
Main Cast : Julianne Moore, Alec Baldwin
Running Time : 101 min
Release Date : 2015.04.29. (국내)




01.

올해 초에 있었던 골든 글로브 시상식과 오스카에서 다른 모든 부분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어도 여우주연상만큼은 그 결과가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압도적인 작품이 하나 있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두 시상식 모두에서 여우주연상을 가져갔고 작품을 먼저 만나게 된 이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올해 주요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작품 <스틸 앨리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올해로 데뷔 26째를 맞이한 "줄리앤 무어"였다.


02.

과연 듣던 대로였다. 영화 속 "줄리앤 무어"의 연기는 한 치의 거짓됨이 없었고,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앨리스" 역을 소화해 내면서도 사라져 가는 기억과는 반대로 짙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최근에 그녀는 <헝거 게임> 시리즈를 포함해 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다작을 해 왔던 탓인지는 몰라도 각각의 작품에서 몰입도 높은 연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기가 시작된 곳은 스크린이 아니라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의 무대 위였음을 떠올려보면 의심의 여지는 없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이번 작품 <스틸 앨리스>는 최근의 행보에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연기 내공을 다시금 확인시켜 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03.

영화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언어학자 "앨리스"가 삶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했던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얻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 작품이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다루어지고 있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스틸 앨리스>는 작품의 전체적인 시선이 기억을 잃은 주인공 본인에게 맞추어져 있다. 기존의 작품들이 당사자 곁의 주변 사람들이 겪어내야 하는 상황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당사자가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여가는 과정에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주인공 "앨리스"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쥴리안 무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이 영화에서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04.

먼저 이 영화는 중심 소재가 되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대해 두 가진 조건(Condition)을 제시하고 있다. 이 특수한 병이라는 것이 특정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가족력이라는 대물림을 통해 스스로의 의지와는 달리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 바로 그 조건들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영화 속에서 "앨리스"라는 인물의 심리를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병이 결코 그 개인의 몫만은 아니라는 점(물론 가족마저도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개인의 무기력함이 존재하기는 한다.)을 강조하게끔 이끌어준다.


05.

주인공인 "앨리스"의 직업이 저명한 언어학자라는 설정은, 영화 속에서 그녀의 병이 밝혀진 이후 모든 가족들이 믿지 못했던 것처럼, 위에서 설명한 첫 번째 컨디션인 알츠하이머가 특정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극대화시킨다. 누구보다 언어에 대해 뛰어난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인물의 알츠하이머를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앨리스"는 본인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행동을 보이지만, 감독은 또 다른 인물, 이미 병에 걸려 요양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 인공위성 개발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꼭 "앨리스"가 아니더라도 역시 예외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06.

한 편, 영화는 주인공 "앨리스"의 병이 가족력으로 인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 5번에서 언급한 것과는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얻고 심리적 상실을 얻는 것이 과연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라는 것이다. 영화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녀의 첫째 딸이 양성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면서 "앨리스"의 정체성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보여줬던 세계적인 언어학자 교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의 어머니라는 곳에도 있음을 부각시킨다. 또한 이 내러티브를 통해 감독은 이 문제의 범주를 개인에서 가족의 영역으로 확장시켜내고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자신의 병을  이야기하면서가 아니라 가족력으로 인해 그들에게 유전될 수 있음을 전하면서 슬퍼하던 장면(그것은 온전히 부모의 마음이었다.)은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된다.


07.

"앨리스" 개인으로만 놓고 보자면 그녀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자신의 평생 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앞으로 잊어가게 될 자신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일이었던 것 같다. 동영상 파일을 통해 자살을 위한 준비를 했던 것도, 알츠하이머 환자들 앞에서 연설을 준비하면서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막내 딸 "리디아"의 조언을 무시하며 어려운 용어들을 써 내려 갔던 것들 그 모두가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츠하이머 연설을 위해 강연장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모습이 그 이전에 연설해 왔던 장소, 대상들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또 그들과 같은 이야기로 공감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08.

위에서 이야기 한 "앨리스"의 동영상 이야길 조금 더 해 보자. 그녀는 훗날 자신이 본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도 떠올리지 못할 순간을 대비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미래의 자신에게 남겨둔다. 그리고 그 영상이 담겨 있는 폴더의 이름을 "Butterfly"라고 기록해 두는데, 이 대목은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나비 목걸이와 대비되며 또 다른 슬픔을 그려낸다. 죽음 앞에서 어머니와의 연결 고리를 떠올렸던 것은 자신이 죽고 난 다음 태어났을 때와 같은 포근했던 품으로의 회귀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09.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2004년에 개봉했었던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잠시 스쳐 지나간다. 특히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난 펜션에서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장면에서 묘하게 오버랩이 되는데,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수진"이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면, "앨리스"는 일정 부분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역시 3번에서 언급했던 이 영화만의 독특한 시점이 잘 드러났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


10.

영화가  계속될수록 "앨리스"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먼저 반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어떤 기억도 나질 않으니 그녀에게는 사과가 아니고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아니 사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병이 가족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부터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첫째 딸인 "안나"로부터 자신이 양성 판정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당장 달려가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장면.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 너머로 "앨리스"는 아마도 세상의 그 어떤 부모보다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11.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이 울컥했던 장면은, 남편인 "존"이 직업 문제로 집을 떠나게 되면서 대신 남게 된 자신의 딸 "리디아"와 포옹을 하는 장면이었다. 아직 누군가의 미래를 지켜야 하는 남편의 입장은 아니었지만 아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존"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고, 엄마를 위해 뉴욕으로  돌아온 "리디아"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앨리스"에 대한 감정이 더해졌는지도 모르겠고..


12.

영화는 "앨리스"의 과거 회상 신과 함께  마무리된다. 이 회상 장면은 "앨리스"가 기억을 잃은 후부터 3-4번에 걸쳐 조금씩 등장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회상 장면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첫 번째 회상 장면에서는 아주 해맑게 웃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인물들이 점차 그 움직임도 줄어들고, 얼굴이 등장하는 장면들도 사라지다가 결국 엔딩에서는 돌아서서 걷는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가까운 기억들부터 점차 사라진다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의 진행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스스로를 반추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를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것 말이다.


13.

영화는 전체적으로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고민 끝에 찾아낸 표현이 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가 갖고 있는 분위기와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인데, 어떤 톤을  이야기하는 지 글로 정확하게 전달이 잘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러닝타임 내내 영화 속 "앨리스"가 되어 그 복잡한 감정들을 스크린을 통해 전해 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터질듯한 감정들보다는 천천히  가슴속에 망울져 오는 어떤 먹먹함의 무거움을 함께 나누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느낌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매우 닮아 있다.


14.

간혹 여러 측면의 이야기를 담으려다 이도 저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작품들을 만나게 되고, 그럴 때면 항상 큰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앨리스"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도,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도 양 쪽 모두의 매력이 잘 담겨져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줄리앤 무어"의 연기는 이 작품의  무게를 오롯히 표현해 내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며, 그와 별개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 가게 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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