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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n 22. 2019

2019 서울국제도서전

아쉬운 하루, 그리고 남은 소회들.

01.


Brunch_브런치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받았을 때가 처음 생각난다. 무엇을 써야할지는 커녕,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을 때. 직장인과 프리랜서의 삶 한가운데서 방황하던 시기였다. 몇 번의 시도를 해봤지만 어쩐지 블로그는 손에 익질 않았고, 겨우 인스타그램의 이 공간에, 사진 하나에 허용된 2000자 글자 수 제한에 전전긍긍하던 때.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바라고 바라던 '작가'라는 호칭과 함께.


플랫폼을 선점한 초창기 작가에게 주어진 혜택은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글을 쓰기만 하면 메인에 걸려, 하루에도 수백 명, 수천 명이 글을 읽어줬다.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보는 '숫자로 평가받는 일'의 중독성은 엄청났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지난밤의 통계를 살폈고. 글을 쓰고 나면 어플의 메인에 글이 걸렸는지 확인했다. 스스로 대단한 작가라도 된 듯 마음에 때가 끼기 시작했다.


작가라는 호칭도, 글의 인기도 모두 너무 쉽게 얻은 것이 화근이랄까. 나는 처음 경험하는 그 우쭐함과 자만에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을 알지 못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이 마치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인 양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넘버링 무비' 매거진이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브런치를 원망하는 마음까지도 생겼다. 자라난 마음의 병은 스스로의 손을 자르고 말았고, 이후 1년이 넘게 브런치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정말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혀지는 동안 브런치에는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훨씬 더 좋은 글과 소재로 플랫폼을 채워나갔다. 그제야 뒤늦게 글을 써보지만 과거에 주어졌던 어드벤티지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지만 글은 플랫폼 아래에서 떠돌고 있을 뿐이다. 모두 자초한 일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대책 없는 어리광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어린양 한 마리가 이제 겨우 걸을 법한 길을 만났는데. 그 길을 조금 따르게 되었다고 금세 우쭐해져서는 제가 놓은 길인 양 으스댄 것이다. 아무도 그리 하라 말하거나 일러준 일은 없었는데. 제가 스스로 그리하여 놓고.


오늘 브런치 부스에서 나는 조금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아니, 이미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그 마음을 다시 꺼내 부스 안에서 혼자 가만히 읽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원래 알고 지내던 작가들. 이제 흠모하게 되어버린 이들의 글과 책이 그곳에서 반짝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이다. 그때 만약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붙잡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늦은 자책과도 같은 것. 그리고, 브런치라는 공간에 아직 내게 주어질 몫의 영역과 그 영역을 채울 시간이 남아 있다면 다시 한번 뜨겁게 뛰어들어 오늘의 브런치 부스를 채우고 있던 작가들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마음이 욕심과 자만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글을 쓰는 마음으로만 채워진 매거진을 언젠가는 이 곳에서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02.


데려온 책들_


a. 경찰관속으로_원도_얼마 전에 팔로우하고 있던 달님 작가님께서 소개해주신 책. 독립 서점 몇 군데를 찾아봤지만 잘 없었는데, 오늘 이후북스 부스에 있어서 데려왔다.


b.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다_박연준_최근에 나온 시간인데 얼마 전 아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제목들이 기발하다며 잠깐 말한 적이 있었다. 생각도 안 했는데 친필 사인본이 두 권 남아 있어서 그중 하나를 냅다 데려왔다. 직접 받지 않아도 좋은 사인.


c.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_장석주_이 책도 광화문 교보에서 살 수 있었겠지만 박연준 작가님의 책을 사는 김에 두 분의 책을 같이 안고 오고 싶어서 데려왔다. 오는 길에 두 권이 하나의 종이 가방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했다.


d. 밤의 여행자들_윤고은_내가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광팬이라는 걸 주변에서는 대충 안다. 사실 어제 광화문 교보 가서도 아직 읽지 않은 시리즈 중에 '도시의 시간'을 사 왔는데. 가판대 위의 시리즈를 보자마자 또 데려오고 말았다. 특히나, 유토피아. 재난. 뭐 그런 설명에 마음이 훅 가고 말았다.


e. 에세이스토리지_Summer 2019_기획도 좋고, 내용도 좋아서 지난 1호부터 챙겨보고 있다. 오늘 부스에서 이 시리즈를 처음 제안하신 분을 뵙게 되었는데. 짧은 이야기만으로도 즐거운 팬의 마음이 되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이걸 사러 해방촌을 못 오를 것 같아서 미리 사 왔다.


f. 키키키린_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_키키키린_사실 이 책은 직접 산 책이 아니다. 이번 도서전에 이 책이 나와 있는 줄 몰랐는데, 목요일에 다녀오자마자 항해 출판사의 피드에서 키키 키린 배우의 포스터를 준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가는 지인에게 부탁했다. 아직 건네받지 못했지만, 포스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있다. 포스터를 받아 액자에 넣는 날, <어느 가족>을 다시 볼 테다.


_

(+) 솔 출판사에서 나온 버지니아 울프 전집도 너무 갖고 싶었고. 그 외에도 데려오고 싶은 책은 넘쳐났지만 더 살 수는 없었다. 언젠가 홍대 북페스티벌에서 생각도 없이 열댓 권을 사서 집까지 땀범벅이 되어 간 날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03.


우성이형_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_절대로 찾아간 거 아니고요. 사람들이 웅성웅성박성웅성 하길래 갔더니 우성이 형이 있었습니다. 이번 도서전에서 난민 이야기를 나누셨다죠. 지금 이 장면도 저서를 구입한 분들께 직접 친필 사인을 하는 자리 같았어요.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잘 생겼어요. 얼마 전, <증인> 시사 때도 만났는데 갈수록 더 잘생겨지는 느낌이랄까..


04.


서울국제도서전의소리_도서전 A 섹션의 한 코너에 보면 작은 음반 코너가 있어요. 이 소리는 성심당이 있는 B 섹션에서 A 섹션의 그 음반 가게까지의 걸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But not for me' 가 너무 좋아서 거기서 10분은 서 있었던 것 같아요.



05.


문학동네_저기 작고 푸르게 빛나는, 어마 무시하게 두꺼운 책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 3권을 한 권으로 묶은 합본 헌정판인데요. 1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거래요. 무려 1504페이지. 그런데 저는 집에 이미 3권이 모두 있고, 그 3권만으로도 이사할 때마다 버거워 죽을 것 같으니 정말 주지 마세요. 이거 이벤트라고 들어서 참여는 하는데, 진짜 이 합본까지 받으면 다음 이사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이벤트라고 사진 속 책만 색깔 뽑은 것도 진짜 아니고. 그냥 제가 문학동네 좋아해서 그래요. 아, 근데 창비도 좋아하고 민음사도 좋아하는데. 문학동네도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굳이 주신다면, 어디 쓸까 생각해봤는데. 아 그냥요. 정말 그냥. 아무 의도 없이 생각해 볼 때 있잖아요-. 1504페이지 정도나 되면, 나중에 기사단장 죽일 때 유용할 것 같긴 해요.



06.


2019_매년 도서전의 느낌이 다르다. 올해는 다른 일정으로 하루밖에 방문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어떤 기분으로 방문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다만, B섹션 초입에 있던 소보로 가게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 공간이 되었겠지만, 책을 고르며 느껴지는 기름진 냄새가 어쩐지 도서전과는 궁합이 좋지 않은 느낌이었달까. 조금 더 가벼운 종류의 스낵이나 빵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최근에 잠을 너무 못 자서 그랬는지 사람 많은 공간에 오래 있다 보니 갑자기 목이 뻣뻣해지면서 속이 갑갑하고 토할 것처럼 불안해졌다. 귀도 멍하고 눈도 흐릿하고. 얼른 나와서 조용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니 조금 괜찮아졌는데. 처음 겪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오늘,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휴게소 화장실 안에서 비슷한 증상을 또 느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다.


이제는 도서전에 스치며 인사를 나눌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마치 영화제에 온 듯한 느낌. 벌써 2020 서울국제도서전에 가 있는 기분이다. (부산영화제를 매년 가서 아는 기분인데, 생각보다 1년은 금방 간다.....?) 내년에는 조금 더 오래, 세심히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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