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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May 21. 2021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진짜 내 삶의 모습.

#210. 2021 전주국제영화제_상영작 11_자유로


**넘버링 무비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01.


서울에서 택시를 운영하고 있는 여진(김정영 분)은 노미터 아줌마로 불린다. 쉬는 날도 없이 운전대를 잡아서다. 택시를 타는 손님들의 온갖 진상을 받아내면서도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는 중국에 있는 딸 보경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서다. 딸에게 생활비를 송금하는 일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돈을 보냈다는 이유를 빌미로 중국에 전화를 걸어 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 되려 그 날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이제 이 일도 오늘로 끝이다. 여진도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딸이 있는 중국으로 갈 계획이다. 마지막 운행이 끝나면 지금 이 택시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비행기를 타러 바로 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방금, 택시를 팔기로 한 금액 중 선수금 일부도 딸에게 먼저 보냈다. 바쁜 일이 있는지 딸이 통화를 받지는 않지만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여진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공항까지는 오랜 친구인 주희(이지하 분)가 함께 가 주기로 했다. 이제 중국에 가면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마지막 소회를 풀 길동무를 할 겸 공항까지 타고 갈 택시를 다시 운전해서 돌아올 사람도 필요했다. 비행기 시간은 6시. 넉넉잡아 2시간 전인 4시에 도착하면 되는데, 아직 2시간이나 남은 2시 밖에 되지 않았으니 별 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렇게 급한 시간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다.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잠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주희. 여진은 안된다고 버텨보지만, 자신이 없으면 차는 누가 다시 끌고 오냐며 잠깐이면 된다는 그녀의 재촉에 여진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린다. 다가오는 비행기 시간에 불안하기는 하지만 친구의 부탁을 모질게 거절하지는 못하는 여진이다.



02.


영화 <자유로>는 여진이 중국에 있는 딸을 만나러 공항까지 가는 길에 벌어지는 일을 담은 작품이다. 갑자기 친구를 만나러 차를 돌려야 한다는 주희의 고집을 시작으로 꼬이기 시작하는 상황은 점차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감독은 이 4시간 남짓한 사이에 벌어지는 몇 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를 통해 한 여성의 삶을 비추고자 한다. 여진이 보여주는 직접적인 행동은 물론,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이 어떤 태도로 대하는 지를 따르다 보면, 여진이라는 인물의 삶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진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역할에는 역시 친구 주희와 딸 보경이 활용된다. 차이가 있다면 친구 주희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딸 보경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부분이다. 주희는 극중 모습을 직접 드러내는 것은 물론, 주된 갈등 관계의 중심에 놓인다. 문제의 발단은 주희의 전 남자친구인 태수(최덕문 분)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사실에 화가 난 그가 주희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 멱살잡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폭행을 휘두를 상황에까지 이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여진이 일단 그를 밀치고 함께 도망쳐 나온다.


이 일로 여진과 주희는 서로 말다툼을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각자 할 말이 있다. 여진의 입장에서는 바로 공항으로 가기만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괜히 차를 돌리라고 한 주희가 원망스럽다. 주희 나름대로는 자기가 이런 상황을 의도하고 만든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는 여진이 달가울 리 없다. 그렇게 시작된 말싸움은 끝내 서로의 아픈 곳을 찌르고 만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이상한 남자들만 만나고 다닌다며 주희를 나무라는 여진과, 평생 힘들게 돈 벌어서 뭐하는 지도 모르는 딸 뒷바라지 하느라 헛고생한다고 앞에서 흉을 보는 주희. 두 사람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길 위에서 헤어진다.


03.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사람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고.’


주희와의 다툼으로 불편한 마음을 채 정리하지 못한 여진은 일단 공항에 혼자 도착한다. 딸을 만날 생각으로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와중에 걸려온 딸의 전화. 딸은 택시를 넘기고 받은 나머지 돈부터 먼저 보내고 비행기를 타라는 말을 시작으로, 공항에 배웅은 못 갈 것 같다며 서운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옆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직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도 전인 여진에게 중국에서 할 일도 없는데 왜 오느냐며 언제 돌아갈 거냐는 말까지 내뱉는다.


차 안에서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줬던 엽서를 꺼내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진. 그녀는 이제껏 그 편지 한 장으로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편지의 끄트머리에 적힌 계좌번호가 딸의 노골적인 요구를 대변하는 것 같지만, 그 앞에 쓰인 애교 섞인 두세 줄의 짧은 내용만으로도 엄마로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과연 딸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로 여겨지고 있을까.



04.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짐이 되어온 사람들을 향해 당사자를 대신해 일갈을 퍼부으며 서로의 자리를 지켜준다. 그래, 어떻게 보면 사랑했던 사람도 자식도 결국에는 그들의 인생에 얹혀가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지내면서도 자신들이 의지하고 있는 대상의 상태에는 별 관심이 없던 이들. 그러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더 볼멘 소리를 하던 사람들. 그런 점에서 여진과 주희는 서로에게 참 좋은 인연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의지할 수 있게 해 준 관계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비로소 웃는다.


아마도 여진은 중국에 가지 않을 것 같고, 주희도 별 볼일 없는 남자들을 이제는 만나고 다니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남은 인생은 자신의 진짜 자유를 위해서 보내게 될 것이다.


‘우리 참 오래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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