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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an 24. 2022

일단 쓰는 글 5.

그러려니..

이 매거진 <일단 쓰는 글>은 사전의 구조 작성이나 탈고 같은 글쓰기의 앞뒤 과정 없이 책상에 앉아마자 바로 떠오른 마음이나 생각을 단숨에 써 내려가는 글입니다. 가장 처음의 글에서 밝힌 대로,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치면 쓰려고 하다가도 포기하게 되는 마음이 생기곤 하더라고요.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모아놓으면 언젠가 고쳐 쓸 글감이 생기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일단 쓰고 있습니다. 


5. 아무 생각없이 지난 주에 입던 옷들을 골라서 평소대로 입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바깥으로 나오니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 주였으면 문을 나서자마자 패딩 점퍼의 지퍼를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텐데 어쩐지 여유로운 기분이랄까. 별로 춥지 않았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여유러운 마음이 들 수 있다니. 따뜻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너그럽고 낙천적이라는 말이 그래서 그런가 보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확실히 가벼워졌다. 사실, 목끝까지 올라오는 니트에 패딩까지 입은 내가 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티는 내고 싶지 않아서 발걸음을 일부러 더 가볍게 걸었다. 오늘 날씨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지하철에 타고 나서였다. 춥지 않은 게 아니라 더워지기 시작한다. 패딩 안쪽으로 열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고 등과 목줄기에서 땀이 조금씩 날 것 같은 느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바로 지난 주까지만 해도 똑같은 상황에서 몸을 더 움츠리며 그 따스함을 간직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제서야 핸드폰을 꺼내서 오늘의 날씨를 찾아본다. 8도다. 영상 8도. 조금 있다가 두어시간이 더 지나면 한낮의 최고 온도는 12도란다. 아. 아무리 가벼운 발걸음을 해봐도 이상하게 보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덥네..


그러려니 하게 되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의 실수나 무심함을 묻어주기 위한 그러려니가 아니라, 평소에 늘 그랬으니 오늘도 그렇겠거니 한다거나 저 사람은 이렇게 대해도 늘 이해해주던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한다거나. 아니면, 이렇게 해도 언제나 최소한의 결과물은 나왔으니까 그러려니 한다던가. 뭐 그런 그러려니들. 처음에 이야기했던 무엇의 잘못을 이해하기 위한 그러려니에 비하면 모양도 속내도 참 별로인 그러려니들이다. - 앞으로 이 그러려니들을 나는 '못생긴 그러려니'라고 부르기로 한다. - 무엇보다 이 못생긴 그러려니들이 진짜 별로인 이유는 쌓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번의 상황이나 마주침으로 그러려니들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여러번 반복해서 같은 상황을 마주하거나 상대를 겪는 과정 속에서 나름의 시선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가늠하면서 그러려니들을 만들고 키워나간다. 가령, 오늘의 날씨만 보더라도. 최근 계속되던 추위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난 주와 같은 옷을 입고 나가도록 만든 셈이다. 추웠으니까 오늘도 춥겠지 하는. 반대로 내일 아침에는 집을 나서기 전에, 옷 입을 준비를 하면서 분명히 날씨를 찾아보게 될 것이다. 오늘 따뜻했던 날씨가 계속될 지, 다시 추워질 지 알기가 힘드니까.


사람에 대한 그러려니도 마찬가지다. 물론 모든 그러려니들이 나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그러려니들은 상대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못생긴 그러려니의 범주 바깥에 놓인 그러려니들은, 특히 취향이나 관점의 지점에서 일종의 윤활유 작용을 하며 관계가 긍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처음에 이렇게 조심스럽던 마음들이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마음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서 눌리면 미묘한 변형이 조금씩 일어난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재단하거나 정확하지도 않으면서 아는 체하게 되고, 반대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사소하게 느껴진다는 자의적 판단으로 상대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이해를 요구하기도 한다. 아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원래 그렇잖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


심각한 상황들에 비하면, 오늘 조금 무겁게 옷을 입고 나선 건 귀여운 편에 속하는 게 아닐까? 더워도 내가 덥고, 이상해 보여도 내가 이상해 보이니까. 그렇다고 한여름에 오리털 파카를 입고 나온 건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한들, 뭐 또 어떤가. 내일 날씨 다시 잘 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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