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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14. 2015

#025. 무뢰한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의 처절한 결말.

타이틀 : 무뢰한
감독 : 오승욱
출연 : 전도연, 김남길
러닝타임 : 118분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일 : 2015.05.27. (국내)




01.

이 영화의 타이틀 <무뢰한>이 주는 단어적 느낌이나 예고편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거친 액션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영화는 '하드보일드'라 불리는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지켜내면서 약간의 변형(기존에 존재하는 같은 장르 작품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비교하여 두 주인공이 표현되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을 가미한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이야기할 만하다.

**하드보일드 장르 : '비정하고 냉혹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범죄나 폭력 등의 사건들에 대해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드러내는 장르들을 일컫는 말이다.


02.

감독의 필모그래피 상 이력이 다음 연출 작품의 모든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초록 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각본에 참여했던 "오승욱" 감독이 꽤나 오랜만에 써 내려간 작품이었기에 <무뢰한>에 있어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면 아마도 시대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괴리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화의 장르적 특색과 작품 전체가 드러내는 특유의 분위기를 통해 그 지점을 영리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03.

먼저 영화 속 내용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이 작품은 주인공인 두 인물, "김혜경"과 "정재곤" 중 어떤 인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엔딩에서 느낄 수 있는 감상에 커다란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알려두고 싶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작품들의 경우 대부분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상당히 개성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 <무뢰한>의 두 배우는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각자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진한 모습으로 작품 속에 위치해 있다.


04.

먼저 "김혜경"이란 인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신의 남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수단이다. 비록 다른 이들의 눈에는 썩어 비틀어진 값 싼 모습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인생에 마지막 남은 동아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박준길"의 숱한 농간에도, "정재곤"이 슬쩍 떠보는 감언(甘言)에도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무너져 버리고 만다.


05.

또한 "김혜경"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그녀가 지금 처해 있는 지옥 같은 현실을 부정해 줄 신기루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평생을 떠돌며 빚만 남기고 만 건물 지하의 어두운 술집으로부터 자신을 양지로 이끌어다 줄 수단과 같은 것.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갈망(渴望)만 해왔던 탓일까, 그녀는 이제 어떤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마음 한 켠을 내어주고 싶은 "재곤"의 앞에서 요리를 잘한다며 줄곧 내뱉는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순수한 여성으로서의, 또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여성으로서의 자존심) 역시 허망하기만 하다.


06.

"재곤"이 그랬듯 "혜경" 역시 순간적으로 그에게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지금 당장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런 사랑이었기 때문에 "준길"에게는 돈만 줘 버리고 나와 같이 살자던 그의 말이 너무 달콤했을 것이다. 그래서 "혜경"은 그의 배신이 너무나 아프다. 어쩌면 "재곤"이 "준길"을 살해한 아픔보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돌아보지 않던 "재곤"의 뒷모습에 더욱 아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07.

반대로 "재곤". 그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상황들, 특히 동료인 "문 형사"의 입을 통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많이 설명되고 있다. 사람의 감정을 이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검거해 내는 잔혹한 인물. "혜경"이라는 인물에게 처음 접근한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해야 하는 만큼 그는 세상 누구보다 외로운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08.

하지만 그랬던 "재곤" 역시 어느 순간부터 "혜경"이라는 인물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만다. 작품 속에서 "재곤"이 그녀에게 빠져들게 되는 확실한 계기가 언급되지 않는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텐프로 출신이라 쉽게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이 때까지 단순히 감정만을 이용해왔던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의외의 강단과 연민이 그의 감정을 매혹시켰던 것 같기도 하다.


09.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혜경"에게 같이 살고 싶다던 "재곤"의 말이 진심이 아닐 리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야만 했던 자신의 신분을 포함한 여러 가지 정황들이 "재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고, 이대로는 "혜경"과 함께 있어봐야 "준길"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10.

팔이나 다리  한쪽만 못 쓰게 만들라던 제안을 넘어서 "재곤"이 "준길"을 죽였던 이유는 일종의 분노였던 것 같다. 단순한 타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도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본인이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 누구도 가질 수 없도록 부셔버리겠다는 마음이 생겨난 게 아니었을까? 그녀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내가 아닌 그런 "준길"을 보며 오열하는 "혜경"에 대한 분노 역시 함께 말이다.


11.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재곤"은 그녀의 칼에 찔리고도 동료 경찰들을 그냥 보내고 만다. 마지막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야만 했던 그가 "혜경"의 곁에서 맴돌고 또 맴돌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독한 말("나는 형사야. 넌 범죄자의 여자고..")을 쏟아냈던 건, 그 관계를 혼자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었던 비겁함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12.

그 고고해 보이던 "혜경"의 마음을 포함해 세상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던 "재곤"은 단 하나의 마음, 스스로를 어쩌지 못해 사랑하는 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반대로 모든 남자들이 마음을 던져와도 자신의 전부를 주지 않았던 "혜경"은 단 한 사람의 마음, "재곤"을 밀어내지 못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일과 그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의 엇갈림이 얼마나 잔혹한 지를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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