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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16. 2015

#028. 채피

"닐 블룸캠프" 감독의 이름 값에 고개를 떨군 비운의 로봇.

Title : Chappie
Director : Neill Blomkamp
Main Cast : Sharlto Copley, Hugh Jackman
Running Time : 120 min
Release Date : 2015.03.19. (국내)




01.

북미에서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자마자 비평가들의 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비운의 로봇이 하나 있다. 5미터 앞에서 바주카포를 정통으로 맞고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져 버린 영화 속 모습처럼 그 모진 말들을 견뎌야만 했던 주인공.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대를 했었던 영화였기에 그런 반응이 누구보다 내심 안타까웠다. 그래도 늘 해왔던 이야기 하나. 직접 관람하지 않았던 영화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리지 않기.


02.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독의 전작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관객이 아니라면 흥미롭게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퀄리티. 다만 비평가들이 이 영화를 발가 벗겨놓고 치욕을 안겨준 데는 아마도 "닐 블룸캠프"라는 감독에게 원하는 것이 이런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는 확실히 "닐 블룸캠프"라는 감독에게 바랬던 무언가가 크게 드러나지 않은 영화였다.


03.

특히 그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할 만큼 괜찮은 출발을 보였던 영화의 전반부는 후반부에 이르러 모조리 어떤 인류애적 가르침으로 변질되어 수렴하기 시작하면서 종을 초월한 "사랑"과 "화합"과 같은 메시지만을 덜컥 남긴 채 끝나 버리고 만다. 사실 감독의 이런 변화는 전작 <엘리시움>에서도 조금 드러난 부분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채피"라는 특정 로봇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다 보니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물리적인 대상에 비물리적 가치들을 섞으려는 시도가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04.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성격이 입체적이지 못한 것도 영화의 매력을 크게 살리지 못한 부분들 중 하나로 보인다. "휴 잭맨"이 연기한 "빈센트"라는 인물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선과 악 사이에서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악당이라고 해서 전부 잔인하고 비겁한 성격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영화 속 캐릭터가 어떤 방향성을 잃고 헤매는 것만큼 어수선해 보이는 것도 없다. 특히나 이런 작품의 경우 메인 캐릭터인 "채피"가 일정 부분 권선징악의 내러티브를 안고 가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05.

그래도 "닐 블룸캠프" 감독이 이 작품에서 흥미롭게 시도했던 부분은 이 한 작품에 유토피아적 이상향과 디스토피아적 암울함을 모두 담아냄으로써 현실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담아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물론 스크린을 통해서는 매우 가볍게 그려지고 있지만, 그 가벼움은 로봇이라는 대상에 대해 기존에 관객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이와 더불어 감독은 유토피아의 역설적 오류에서 발생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개선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인간이라는 것 또한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06.

영화 속에서 "디온"이라는 인물이 로봇 "스카우트"를 통해 제시한 유토피아가 무너지게 된 것은 결국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독자적으로 창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영화 속에서 "빈센트"는 이 유일한 약점을 통해 "디온"의 성공적인 유토피아를 무너뜨리는데, 이 장면 또한 현실 속 인공지능 기술들의 불완전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인간과 비슷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창조되지 못하고 어떤 프로그램이나, 코드키로부터 생성될  수밖에 없는 한, 그 기술은 완전무결하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07.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지켜본 부분은 영화 속에서 "학습"이라는 행위가 결코 "채피"라는 로봇에게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채피" 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어떠한 "학습"을 하게 되고 그 "학습"의 결과물로 인해 자신의 행동 양식을 수정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학습"이라는 개념을 "채피"와 인물들이 각각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특히 평생을 연구만 해 온 프로그래머이자, 약속까지 받아내며 "채피"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주문했던 "디온"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연구 결과물(채피)을 돌려받기 위해 총을 구입하는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다.


08.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한 가지 그려내고 마는데, 바로 "빈센트"라는 인물이 만든 "신경전달기계"라는 물건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 기계는 영화 내내 로봇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자의 뇌파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채피"는 이 기계를 이용해 사람의 정신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작업을 수행해 낸다. 그래서 "채피"가 이 기계를 훔쳐 달아난 뒤 죽어가는 자신을 백업하기 위하여 자신의 머리에 이 기계를 씌우고 백업 프로세싱에 두 어번의 시도에 실패할 때, 나는 그래도 "채피"가 기계이기에 마음이라는 영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디온"이 기계가 되고, "엄마"가 USB가 되고.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혹시 "닐 블롬캠프"가 "뤽 베송" 감독의 <루시>를 감명 깊게 본 건 아니었을까?


09.

벌써 7년 전,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일약 스타에 오른 "데브 파탈"은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맹하게만 보이는 이 배우가 평범한 삶에서 어떤 사건에 휘말려 그 내면이 변해가는 인물만 맡았다 하면 눈을 뗄 수가 없다. 어쩌면 그가 실제로 영국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점이 그의 연기에 도움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작품 <채피>에서도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다.


10.

"닐 블룸캠프" 감독은 늘 주류에서 벗어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SF 장르와 적절히 잘 융화시켜왔다. 이번 작품도 그의 그런 성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다만,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강렬하고 선이 굵었던 첫인상이 작품이 더해가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희석되는 느낌은 분명히 존재한다. 날카로운 턱선이 두터워지는 지방살에 조금씩 자취를 감춰가는 느낌이랄까. 문화 산업의 생산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일은 대중의 기호를 선도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버린 채 이리 저리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닐 블룸캠프" 감독이 지금 약간 대중성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이런 행보가  계속된다면 차기작으로 내정되어 있는 <에어리언>은 전작들의 명성을 한 번에 씹어 망가뜨리는 작품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P.S. 그나저나, "닐 블룸캠프" 감독은 요하네스버그에서 언제쯤 떠날 수 있으려나. 설마, <에어리언>도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는 건 아니겠지...?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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