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24] 웨스 앤더슨 X 로알드 달 시리즈, 영화 <독>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감독은 셀 수 없이 많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다보면 대중과 평단이 그 힘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그 중에서도 웨스 앤더슨 감독은 가히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자신만의 인장으로 웨스 앤더슨 영화를 만들어 왔다. 같은 배우나 스태프를 자신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시키는 것(웨스 앤더슨 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나 극 중에서 높은 수준으로 억제된 연기와 톤도 그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강하게 통제되어 있는 표현법 역시 마찬가지다. 고정된 카메라를 기본으로 한 패닝과 주밍의 움직임, 철저히 계산된 좌우대칭 프레임은 일부 장면만 보더라도 그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그동안 계속해서 장편 작업을 이어온 웨스 앤더슨 감독이 이번에는 단편 영화로 눈을 돌렸다. 영국의 유명 소설가인 로알드 달의 단편집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가운데 네 편의 작품을 넷플릭스와 함께 작업한 것이다. 그는 이미 2009년 연출한 <판타스틱 Mr. 폭스>를 통해 로알드 달 작가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바 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방식을 차용했던 이 작품은 흥행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넷플릭스와 함께 작업한 작품은 총 네 편이다.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백조>, <쥐잡이 사내> 그리고 <독>이다. 원작에 따르면,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가 타이틀이자 메인 스토리로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를 관람하는데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가장 직관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편의 이야기는 극 너머에 감춰진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선사한다. 여전히 흩어지지 않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세계와 함께다.
네 편의 이야기 가운데 <독>은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해리 포프(베네딕트 컴버배치 분)를 찾아온 우즈(데브 파텔 분)로부터 시작된다.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해리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우즈는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책 뒤쪽 가슴 부분에 뭔가를 느낀 해리는 잠옷 위로 기어올라오는 작은 우산뱀을 발견하고는 누군가 올 때까지 몇 시간이나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직 안 물렸어.”
참고로 우산뱀은 맹독을 가지고 있어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심지어 작고 가늘기 때문에 침실문의 작은 틈으로도 아무도 모르게 들어올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언젠가 우산뱀에 물린 양의 사체를 갈라봤더니 그 피가 새까만 타르와도 같았다는 관리인의 말도 있었다. 자신의 침대 위로 올라온 우산뱀의 존재에 해리는 꼼짝도 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죽을수도 있는 상황에 직접 놓여 있는 인물과 도움을 주고자 하지만 그 위협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이의 감정과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우즈는 이 상황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하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해리는 어떻게든 빨리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이 작품이 바라보는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 그 중 첫 번째다. 동일한 상황도 자신과 타인의 일 사이에서는 의도와 마음과는 달리 다르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이 아닌 제 3의 인물이 개입하게 된다. 의사 간더바이(벤 킹슬리 분)다. 우산뱀에게 물리게 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해독제가 필요하다. 역시 우즈가 아닌, 당장 위험에 놓인 해리가 떠올린 생각이다. 해독제를 맞고 난 후에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산뱀은 여전히 침대 위에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해독제도 완벽하지는 않다. 이제 간더바이와 우즈 두 사람은 뱀을 쫓기 위해 마취제를 살포하기로 한다.
짙은 긴장감이 계속된다. 영상에서는 몇 분 지나지 않지만, 설정 상으로는 한두시간이 훌쩍 더 지나버렸다. 우즈가 마취제를 가지러 의사의 집에 다녀왔고, 마취제를 침대에 살포하고, 또 제대로 스며들길 기다리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물론 해리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할 수 없다.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해리가 아닌 두 사람이 당장 침대 위에 누워 있었어도 이렇게 길고 오랜 방법을 요구했을까? 분명 자신을 위해 열심인 두 사람이지만 해리는 해리대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영화는 극의 긴장감과 더불어 해리라는 인물의 내면에 쌓이고 있을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극을 빼곡히 채우는 인물의 대사로 이끌어낸다. 극중 나래이션이 단순히 상황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역할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그 대사에 따라 시선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고, 영화는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를 또 한번 쌓아 올리는 역할도 한다. 1차적인 미장센이 영화의 바깥에 놓인 물리적인 미술에 있다면, 2차적인 미장센은 그 위에서 형성되는 나래이션이 이끄는 시선의 방향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사와 무관하게 영화의 장면을 살피다 보면 처음에 보지 못한 장면들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길고 긴 절차 끝에 두 사람은 해리의 이불을 걷어내지만 그의 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처음으로 큰 동작으로 움직이는 해리 역시 잠시간의 요란 끝에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확인한다. 이 이야기의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문제, 인간의 이중성은 바로 그 다음에 놓인다. 함께 긴장된 시간을 건너 온 의사 간더바이가 긴장이 풀려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스갯소리를 꺼낸 직후다. 자신을 비아냥거린다고 느낀 해리는 곧바로 ‘더러운 뱅골 시궁쥐’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뱉는다.
그러고보니, 영화의 배경과 그들이 한 차례 소동을 벌인 건물의 외형이 조금 달라 보인다. 체념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그대로 떠나버린 의사의 모습 뒤로 ‘대영제국 황마 농장’이라는 팻말도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언급된 적 없지만, 이 이야기가 영국령의 인도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더러운 뱅골 시궁쥐’라는 해리의 말은 자신의 땅을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놓인 타국의 군인을 구하고자 했던 의사 간더바이로 하여금 크나큰 치욕과 무력감을 갖게 할만한 대사다. 자신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과 그 상황으로 벗어난 때에 드러난 두 이질적인 태도. 해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해 영화는 묻는다.
모두가 그렇다. 자신이 놓인 상황과 여건이 여유로울 때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진짜 모습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급박한 위기에 놓였을 때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할 때는 누구나 자신을 숙이고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한 상대의 움직임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 그때 보이는 행동이야말로 그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이 영화 속 해리 포프의 행동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