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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25. 2015

#040. 보이후드

12년이라는 시간 속에 감추어진 진한 감동.

Title : Boyhood
Director : Richard Linklater
Main Cast : Ellar Coltrane, Ethan Hawke, Patricia Arquette
Running Time : 165 min
Release Date : 2014.10.23. (국내)




01.

이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되뇌었던 것 같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리처드 링클레이터". 그리고 또 한 번, "리처드 링클레이터". 이제껏 이 면식도 한 번 없없던 남자로부터 받은 감동들을 수치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그 숫자는 얼마를 가리키게 될까? <비포 시리즈>를 통해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두 배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마음을 뒤흔들던 그가 이번에는 한 소년 "메이슨"(엘라 콜트레인 역)의 성장 이야기를 통해 온  머릿속을 헝클어 놓는다.


02.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어떤 작품들보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고,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쓴 채로 엔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멍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부터 되짚어 보아야 할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다가와서 그저 알아서  떠질 때까지 눈을 감고 온 몸을 시트에 맡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03.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 영화를 처음 제작할 당시, 6살의 한 소년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 꼭 12년의 이야기를 매년 15분씩 담고자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바람대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던 지난 2011년 여름, 미국 텍사스 지역을 포위한 커다란 화마는 "리쳐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집을 송두리째 삼켜버렸고 이 작품과 관련된 그의 수 많은 시나리오와 제작노트들도 한줌의  재가되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지금의 모습인 것이라고..


04.

사실 내게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감독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기보다 시간을 담아내는 감독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의 첫 장편이었던 <슬래커>(1991)도 그랬고, 18년이라는 시간을 너머  사랑받았던 <비포 시리즈>도, 이번 작품 <보이후드>도 그의 모든 작품들이 말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시선을 통해 세상에 표현되는 작품들은 작품 속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애써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 모두를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05.

사실 이번 작품 <보이후드>는 그가 그 동안 만들어 온 작품들 가운데는 스토리적으로 가장 불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이 영화 속의 이야기들이 분명히 우리 자신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타인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스스로의 과거를 뒤돌아 보게 만든다는데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 지, 나와 나의 부모님은 어땠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아이가 되기를  요구받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06.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 "메이슨"의 성장 일기가 그리 흥미롭지 않다면, 일련의 과정들에서 "메이슨"이 겪게 되는 아픔들을 이해하며 영화를 따라가는 것도 이 작품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일 수 있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메이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가 계속해서 바뀌었으며, 심지어 매번 바뀌는 그 어떤 아버지 밑에서도 안정적인 가정을 가질 수가 없었던 인물이다.  하나뿐이었던 피붙이 누나(로렐라이 링클레이터 역)는 늘 견제와 경쟁의 대상이었고, 나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편이라고 생각했을 친 아버지조차 그런 누나의 능력을 더욱  대단해했다. 가정 폭력은 물론, 익숙해질 법하면 다녀야 했던 전학에, 마지막 피난처였을 어머니(패트리샤 아퀘트 역)조차 자신이 필요로 할 땐 연락이 되지 않으니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었던 아이.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열댓 살이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07.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롱테이크 신'은 이 영화에서도 계속된다. 특히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는 누나를 뒤로 하고 대학 강의실로 향하는 골목 신은 마치 <비포 선셋>(2004)의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 두 커플이 다시 만나 "Le Pure Cafe"를 찾아가던 그 골목길의 대화가 떠오를 정도로 인상 깊다. 사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서 이 기법을 활용하길 즐겨하는데, 어쩌면 이 '롱테이크 신'이야말로 작품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 '시간'의 연속성을 기술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08.

사실 이 영화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지 않다. 이는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 스스로에게 남겨진 몫이며, 이 영화를 향하는 모든 평론과 리뷰들은 결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작품의 상영이 끝나고 "영화"라는 장르가 결코 순간적인 장면과 찰나의 화려함만을 보여주는 예술이 아니라, "시간"을 담아내고 "추억"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세계라는 것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성공한 게 아닐까? 그리고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적화 된 예술가일 것이고 말이다.


09.

이 영화에서 제일 쓸모없어 보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역시 "에단 호크"였다. 연기의 기술적인 측면을 떠나 그가 맡은 캐릭터의 역할을 너무나 잘 소화해 내고 있다. 순간 순간 철이 없어 보이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일상의 소소한 위트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모습. 또한 "메이슨"이 만난 몇 명의 아버지들 중 그래도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는 존재였달까? 영화의 내용을 떠나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비포 시리즈>에서 늙어가던 "에단 호크"의 모습과 이 작품 <보이후드> 내에서 늙어가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였을텐데..


10.

이건 이 글을 써 내려오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메이슨"이 영화 속에서 사진과 관련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이 작품 전체에 있어 그리 단순한 이유로 만들어진 설정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늘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 채로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말이다. 엔딩에서 그가 던지는 마지막 대사, "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 역시 마음 속 깊이 가라앉는 걸 보면 그가 사진과 관련된 공부를 시작한 것에는 분명히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이다.


11.

마지막으로 3번의 이야기로 거슬러 가 보자. 화마가 삼켜버린, 잿더미만 남은 자신의 집터를 보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이런 게 인생이지." 이 영화 단 한 작품을 표현해 내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가슴 졸이며 보냈을 그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계획했던 12년의 시간들 중에 10년이 지나고, 이제 단 2년 밖에 남지 않은 프로젝트의 잿더미 속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었기에 그의 작품들이 우리들의 인생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P.S. 딸 "사만다" 역할의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친딸이다.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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