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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03. 2015

#006. 러덜리스

진심이 담긴 영화의 떨림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Title : Rudderless
Director  : William H. Macy
Main Cast : Billy Crudup, Anton Yelchin
Running time : 105 min
Release Date : 2015.07.09 (국내)




01.

역시 선댄스. 내가 사랑하는 영화제다운 작품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열린 제 30회 선댄스 영화제의 주인공이 <위플래시>였다면 이 영화 <러덜리스>는 그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는 폐막작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마지막 자리에서 이 영화를 마주한 모든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잠시 동안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난 뒤 사실은 많은 기대를 했었던 작품이었지만 솔직히 개봉 리스트가 뜨기 전까지 이 영화가 개봉한 지도 모르고 있었다. 최근에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작년에 만들어 놓은 선댄스 기대작 리스트 따위는 올해 새롭게 만들어 둔 리스트에 밀려 메모장 뒤편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 그렇다.


02.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이 하나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윌리엄.H.머시" 감독. 사실 감독이라기보다는 정말 다양한 영화에서 활약한 뛰어난 연기파 배우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오래된 작품이긴 하지만 <파고>의 의뭉스러운 자동차 세일즈맨을 능청스럽게 연기해냈던 배우. 직접 메가폰을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지금까지 그는 총 4편의 작품을 연출 중에 있는데, <러덜리스>는  그중 두 번째 작품이다. 이제 막 연출을 시작한 감독으로서 보여주는 그의 재능은 물론 아직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르고>의 "벤 에플렉" 감독을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벤 에플렉" 감독들의 작품이 잘 짜여진 긴박한 내러티브 속에서 인물들의 타이트한 감정들을 잘 드러낸다면, "윌리엄.H.머시" 감독은 유려한 흐름 속에서 관객의 감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방법들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늘은 "윌리엄.H.머시" 감독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혹시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벤 에플렉" 감독의 연출작들도 추천하는 바이다.


03.

이 영화의 국내 홍보물 카피가 강조하고 있듯, 영화는  그동안 관객들이 만나온 음악 영화들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전의 다른 음악영화들과 형식적으로 유사한 부분을 보인다. 다만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겉모습은 같아 보이지만 심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에서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어떤 차이점이 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어떤 무게감 때문일까.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다루었던 <프랭크>, <위플래시>나 남녀 간의 로맨스를  이야기했던 <원스>, <비긴 어게인>과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다. 누군가의 상실감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애틋한 부정(父情)에 대한 이야기. 그래,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고 필요할 때만 부르는 이름이지만, 누구에게나 부모라는 존재의 무게는 한 없이 무거운 법이니까 말이다.


04.

일반적으로 다른 장르에 비해 음악 영화들이 많은 관객들의 호평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데는 역시 "음악"이라는 콘텐츠가 큰 역할을 한다. 관객들이 영화를 수용하는데 이용하는 주된 감각 기관, 눈과 귀, 둘 중 하나를 일단 만족시키고 시작하기 때문. 다른 말로 하면, 영화의 구조적인 부분이나 스토리 상의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조금 부족하더라도 음악이 영화에 남기고 지나가는 분위기만으로도 그 약점을 충분히 메울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다. 영화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귓가에 '착'하고 달라붙는 음악들을 들려줌으로써 그 의구심을 지워내는 느낌이 존재한다. 특히, "샘"이 "쿠엔틴"과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은 너무 돌발적이고 우연적이지 않나. 이 영화가 실화라는 의심을 받았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현실성이 강했던 것에 비하면 특정 장면들은 뜬금없는 우연성에 기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감정은 무너지지 않도록 다른 요소들을 잘 이용했으니 영화 전체의 틀을 생각하면 감독이 영리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05.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A Part와 사고가 일어난 뒤의 B Part. 물론 분량 상으로 영화는 B Part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A Part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B Part의 절반 이상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이 감독의 의도였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분명히 지금 극장에 릴리즈 된 필름의 편집은 A Part에서 "샘"의 아들인 "조쉬"가 사고의 희생자로 이해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때문에 부모인 "샘"과 "에밀리"가 함께 "조쉬"의 비석을 찾는 신(Scene) 전까지는 커다란 오해 속에서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 아쉽기는 하다. 만약 이 부분이 의도된 연출이라면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이 희생자와 가해자의 부모 두 입장 모두를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 같은데, 두 입장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의도를 오롯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결국 Part A를 "희생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 관객들은 거시적인 이해를 하게 되기 보다는 일종의 반전적 경험만을 하는 것으로 그치게 된다.


06.

영화를 A와 B 파트로 나눈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영화가 두 이야기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상이하기 때문이다. Part A에서 '누군가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Part B에서는 '다양한 상실감의 표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이 주제에 따라 "샘"이 보여주는 주인공의 모습 또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특히 Part B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상실감의 표현'은 이 영화에서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얽매여 힘들어만 하며 살아온 "조쉬"의 여자친구 "케이트", 어떻게든 사죄하고 용서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엄마. 그리고 밴드에 가려진 상처가 아물기만을 기다리며 모른 척 했던 "샘". 모두가 같은 상황을, 같은 상처를 입었지만 각자의 상황과 경험에 따라 모두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방법과 모습이 모두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모습들 모두가 그들의 슬픔이며 또 아픔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역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대변되는 흑백논리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 것과 상동하는 것이 아닐까.


07.

그런 점에서 사고가 일어났던 학교 안 추모비 앞에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는 "샘"의 모습은 함께 아픔을 느끼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의 말미에 "샘"이 말하듯 "조쉬"는 그래도 어쨌거나 그의 아들이다.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인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쉬"는 역시 "샘"에게 있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세상을 떠났지만 살인마였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슬퍼하지 못했던, 아니 슬퍼할 수 없었던 부모의 마음. 그 오랜 시간을 묵혀두어야만 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듯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어쩌면 "샘"의 이 슬픔은 비단 자기 아들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들의 유품들, 아들이 만들어 놓고 떠난 음악들을 듣고 직접 연주해 보며  그때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진짜 아들의 모습을 뒤늦게 깨닫게 된 자신의 어리석음에 어떤 회한이 남았던 건 아니었을까? 아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진작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08.

B 파트를 다시 한 번 또 나눠볼까? 영화를 보기 전에 우연히(사실 다른 사람의 글은 영화가 보기 전에는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다.) 한 칼럼니스트가 이 영화의 후반부를 "쿠엔틴"에 무게를 놓고 "샘"의 과거 사건으로 인해 스토리가 전환되는 지점을 기준으로 나누어 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 영화 속에서 후반부 내러티브의 변곡점은 분명히 그 지점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읻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B 파트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은 "샘"이 음악을 하는 이유가 변하는 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다.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순간에 "샘"이 음악을 하는 이유가 자신의 아들이었던 "조쉬"에게서 아들처럼 느껴지는 "쿠엔틴"으로 옮겨가는 순간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펙터를 사는 장면, 옷을 사 주는 장면, 여성을 만나게 해 주는 순간 등. 진짜 아버지와 아들이 정을 쌓아가듯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 부분을 B 파트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이 때를 기점으로 "샘"이 자신의 과거를, 아들의 과오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쿠엔틴"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이 모든 과정과 이야기 끝에 이 영화의 엔딩이 만들어 내는 절절함이 숨겨져 있다.


09.

영화의 주된 포커스가 "샘"에게 맞추어져 있지만 "쿠엔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샘"의 음악을, 정확하게는 "조쉬"의 음악을 가장 먼저 제대로 들은 인물이자, "샘"을 사회와 분리시켜 놓았던 그의 안식처, 요트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인물. 하지만 어린 시절의 가정 문제에서부터 대인기피증, 무대공포증 등 그 스스로도 많은 어려움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샘"과 "쿠엔틴" 두 사람의 관계와 내러티브들은 결코 일방적일 수만은 없었던, 두 사람이 함께  주고받았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도넛 가게에서 마지막으로 "샘"과 만난 이후, 두 사람의 재회 여부에 대해서는 영화 상에서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첫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펍의 어느 한 구석에서 "샘"의 마지막 노래를, 솔직함이 담긴 그 음악을 조용히 듣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게 된다.


10.

그리고 마지막 엔딩. 이 장면에서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숨 막히는 엔딩을 올해 초에서 한 번 느꼈던 적이 있었다. "마일즈 텔러"와 "J.K.시몬스"의 광기가 서려 있었던 <위플래시>의 엔딩.  그때 <위플래시>의 뜨거운 엔딩이 광기와 흥분에 차 숨이 막혔다면, 이 영화는 정반대로 차분함과 외로움, 후회와 속죄가 담긴 엔딩에 숨이 막혀왔다. 같은 뜨거움이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감정은 전혀 다른 색깔이었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실제로 러닝 타임 상의 4분 남짓이었던 마지막 노래가 끝나고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는데, 스크린 속의 "샘" 역시 같은 모습이었다. 힘껏 들이 마셨던 공기를 털썩. 하고 내려 놓던 그 마지막 숨소리가 스탠딩 마이크 속으로 흘러들어가 만든 작은 울림 그리고 떨림. 홀로 남겨진 스탠딩 마이크의 라스트 신이 아직도 숨 막히게 떨려온다.


11.

보는 내내 마음이 들썩여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영화들은 언제나 글을 쓰기가 어렵다. 그 때의 감정이 떠올라 냉정해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글을 쓰는 내내 몇 번이나 멈추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을 줄여야 할까 고민했다. 쉽지 않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두 번, 세 번 보아도 새로운 모습을 찾아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영화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


12.

이 작품에 감독인 "윌리엄.H.머시"가 등장한다. 그것도 여러 번. 과연 어떤 역할이었을까. 그를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으로 남을 것 같다.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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