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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r 23. 2019

당신의 소행성 B612는 어떤가요?

그녀는 요즘 떡갈나무와 사귄다.

 오늘도 나의 별에는 종말과 낭만이 함께 공존한다. 활화산 세 개와 장미꽃이 있다. 땅 속 깊이 숨어 있다가 별 전체를 휘감아버릴 수도 있는 바오밥나무도 있다. 성가시지만 적당한 긴장은 필요하다. 기꺼이 나의 순정을 바친다. 비교도, 투정도, 거짓말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시였다고 이해하자. 그 가시에 떨구었던 나의 핏방울조차 내가 기꺼이 바친 나의 순정이었다. 내가 떠나야 하는 이유이고 돌아가야 할 이유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안부를 묻는다. 밤새 나의 안녕을 묻고 너의 안녕을 묻고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바오밥나무도 교회당만큼 커버리기 전에는 양들이 먹어 치울 수 있을 만큼 작았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경전처럼 수없이 되뇌인다. 그리고 오늘을 쓰다듬으며, 석양과 유성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가련한 내가 나에게 허락하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떡갈나무를 데리고 왔다. 요즘 인기종으로 뜨고 있는 식물이다. 관상용으로도, 공기정화용으로도 탁월하다고 한다. 요즘은 아내가 화분을 사다 나른다. 때로는 사놓고 며칠 다른 집에 맡겼다가 마치 얻어온 것처럼 집으로 데리고 온다. 화분 세탁을 한 것이다. 냄새가 난다. 누군가의 집에 맡겨놓고 몰래 만나고 오는 떡갈나무가 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잎의 색깔이 짙고 광택이 있다. 병충해에 강하고 키우기도 쉬울 것처럼 생겼다. 나는 이 비율 파괴의 식물이 못마땅하다. 가분수처럼 잎만 너무 넓적하게 커서 자연스럽지가 않다. 비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취향이 아니다.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르게 불안정하다.


 “만져주니까 좋지.”


 그녀는 요즘 떡갈나무와 사귄다. 화분을 만지기 위해 손을 씻는다. 손으로 흙을 더듬거나 잎을 어루만지고 소소한 얘기를 귓속말처럼 소곤거린다. 아침이면 쌀뜨물을 골고루 먹이를 주듯 화분마다 나누어준다. 쌀뜨물은 식물에 좋은 비료가 된다. 그러나 벌레들이 꼬이고 토양이 딱딱해지거나 곰팡이가 필 수도 있다. 비가 오는 날은 괜히 짜증을 부린다. 떡갈나무가 받아야 할 햇볕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창가로 햇볕이 많이 드는 날은 화분을 그늘로 옮긴다. 간접 광을 받아야 잎이 풍성하게 자란다. 화분이 무거워질 것을 대비해 바퀴가 달린 받침대를 샀다. 기다리던 새잎이 나오던 날, 우리 집 아침은 월드컵 경기를 보던 날처럼 시끌시끌했다. 화분을 살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우리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 떡갈나무에 쏟는 정성의 반만 나에게 쏟았어도 우리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너, 미쳤어?”


 떡갈나무 잎이 찢어졌다. 아들은 순간 당황했다. 엄마의 욱하는 성깔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수컷의 표정이다. 잎이 튼튼해 보였기 때문에 살짝 딱밤을 쳐본 것뿐이다. 찢어질 줄 알았으면 쳤겠냐는 투의 아들의 항변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우리 집에는 난기류가 흐르고 있다.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다. 아들은 오랜만에 온 집에서 엄마의 채취가 묻어있을 엄마의 관심사를 툭툭 건드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떡갈나무를 매만지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미지의 세계. 그 단호하기만 했던 시간을 아이들을 키우느라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그리움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이고 당당히 자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떠나고 그리움을 지킬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지금 엄마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리울 때는 엄마의 보이스톡을 받지 않는다. 장모님도 지금 막내딸처럼 화분을 닦고 계실 것이다. 애꿎게 카카오톡이 고장 났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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