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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pr 12. 2019

우리의 봄날은 가고 있다

이대로 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시작할 것만 같았다. 

 반스톤 아일랜드 Barnstone Island, 작은 섬이 있다. 섬이 그리울 때 바지선에 나를 싣는다. 배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다.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불과 100여 명 정도이다. 원주민 보호구역이 있고 대부분의 땅은 개인 소유의 농장이다. 약 10km의 편평한 포장도로가 섬을 둘러싸고 있어 계속 가다 보면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른 길도 없고 주차공간도 없고 가게도 없다. 바다에 있는 섬이 아니라 강 사이에 있는 섬이다. 아차, 쓰레기통도 없다.


 여행 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이 섬이 나에게는 보석 같다. 사람이라도 건널 수 있는 다리 하나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일부러 눈길을 마주치지 않던 여인네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바지선이 느리게 강을 건너고 있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곳도 드물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것이 없다. 자세히 보면 섬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제재소에 쌓인, 나무 톱밥의 높이만 달라진다. 섬에는 첫 글자만 알려주면 금방 이름을 알 것 같은 그럴듯한 꽃나무도 없다. 이름 모를 들꽃들만 강바람에 흔들린다. 섬을 한 바퀴 돌려면 2시간 정도가 걸린다. 나는 낭만을 걷는다. 나의 삶의 대부분은 아다지오이다. 느리고 조용하다. 단조롭게 살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의 인생은 멈출 수도 없었다. 잠시 머무는 것도 망설여야 할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다른 것에 한 눈을 팔고 마음을 빼앗길 겨를이 없었다. 그 무엇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없다. 돌이켜보면 전부 끌어안고 가야 할 것뿐이었다.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도, 돌아갈 길도 없었다. 바지선만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통로였다.


 “나, 세상 편한 남자지?”

 “그렇지. 어려울 건 없지.”


 빵 한 조각에 계란 프라이 하나, 사과 한 개, 커피 한 잔. 나의 아침 식단이다. 그런 나에게 질리지도 않느냐고 묻는다. 옷도, 신발도 마음에 드는 것 사서 헤어져 입을 수 없을 때까지 입는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는 어떤 옷을 입을지를 고민해 본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먼저 눈에 띄는 옷을 고르다 보니 같은 옷을 입을 때가 많다. 사실 옷의 스타일도 색깔도 거의 비슷하다. 나는 쉽게 질리지 않는 남자다.


 “창피해 죽겠어. 제발 버려.”

 “한 번만 더 빨아줘 다음에 버릴게.”


 빨래 바구니에 넣은 색이 바랜 츄리닝 바지를 들고 아내가 짜증을 낸다. 똑같은 잔소리를 몇 번쯤 들었을까. 아마도 아내는 그 옷을 또 세탁기에 돌릴 것이고, 나는 거의 비슷한 츄리닝을 산 다음에야 그 옷을 버릴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이사를 한 집이 달랐을 뿐 사람도 가구도 전부 그대로였다. 아이들이 자라서 내 키를 넘었을 뿐 내가 작아진 것이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예측 가능한 남자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자신이 골라준 옷을 마다하고 다른 옷을 고르는 것이 영 마땅치가 않은가 보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멋있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내가 아직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거울에 비친 나에게는 일단 마음에 그리던 비율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색감이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산다. 마네킹이 걸칠 때 나오는 색감을 나는 낼 수가 없다. 차라리 나에게 어울리는 천박함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옷을 사 들고 나오면서 문득 영화 속 대사가 생각났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뭘 간절히 바라도 다 잊고 그러더라.’


 사랑은 변할 수 없다는 말이었을까, 사랑은 변한다는 말이었을까.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의 봄날은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스톤 아일랜드를 나오는 바지선을 탈 때도 뗏목을 타고 프레이저 강을 떠내려가는 상상을 했다. 이대로 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시작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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