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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r 15. 2019

심금을 울리다

심장의 여섯 겹 근육을 누르고, 튕기고, 뜯어서 연주되는 거문고 소리.

 ‘마흔세 번 석양을 본 날 너는 그만큼 슬펐겠구나.’


 나는 무턱대고 이 구절이 좋았다. 그것이 까까머리 중학생이 어린왕자를 열병처럼 사랑하게 된 이유의 전부이다. 오늘처럼 불쑥 찾아온 슬픔의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날에는 어린왕자를 펴서 이 구절을 읽는다. 마치 주문처럼 읽고 또 읽는다. 요즘 부쩍 힘겹다는 생각이 들었고 괜히 슬펐다. 그런데 그 서글픔의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다.


 ‘하고 싶은 거 하면 신나고, 정말 신나면 재미있고, 정말 재미있으면 미치고, 정말 미치면 안 되는 게 없다.’ 


 무한도전의 한 멤버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그는 밀라노 패션쇼 진출에 도전하기 위해 한 달 동안 몸무게 15kg을 감량하고, 자랑스럽게 초콜릿 복근을 공개했다. 

거울에 비친 한 사내의 모습을 보고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나는 재미있는 일도, 신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자꾸만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서러운 중년이다. 몰래 숨어서 하던 일을 누군가에게라도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웠지만,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지는 이유가 점점 근육이 닳아지기 때문이라고 숙련된 조교처럼 결론을 내렸다. 낡고 헐렁한 티셔츠로 가릴 수 없는 찌든 느끼함, 가장의 무게로 절인 소금기를 토해놓느라 헉헉거린다. 나는 가장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운동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핀잔을 못 이기는 척 시작했다. 짐에서 젊은 갑빠들을 따라 하다가 목에 담이 걸려서 며칠을 고생했다. 누군가에게 얻은 덤벨과 피아노 의자를 벤치 삼아서 나의 청승맞은 운동은 시작되었다. 어쩔 수 없는 시심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근육


찢어지는 고통을 벌겋게 달구고

화덕보다 진한 슬픔을 벼리고

흐드러진 꽃잎 문장으로 새기고 


아직 살아있음을 

아직 죽지 않았음을 

상처는 모두 핏발 선 역사인 것을 


 우리 몸에는 660여 개의 크고 작은 근육들이 있다. 내장 기관이나 혈관,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불수의근은 자율신경계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뼈에 붙어있는 골격근이 운동을 통해서 키울 수 있는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의근이다. 어깨에는 승모근, 가슴의 대흉근, 팔뚝에 이두박근, 삼두박근 혹은 알통으로 불리는 상완이두근, 삼두근, 배에는 식스팩으로 통칭하는 복직근, 옆구리에는 외복사근, 허벅지에는 대퇴사두근, 이두근이 주요 골격근들의 이름이다. 근육의 세계에서는 항상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근육의 수축과 이완의 반복이 근육의 성장을 결정하는 근육들의 전쟁이다. 반복적인 운동을 통해 근육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어야만 하고, 그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을 일정 기간 거쳐야만 근육이 만들어진다. 우리네 인생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작 수의근보다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할 불수의근을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향기에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밤새도록 쓰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 데 쓸 수가 없어서 고뇌하고 싶다. 훌쩍 밤바다를 찾아가서 파도소리에 묻히는 노래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고 싶다. 


 나는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금방 싫증을 내고 식어버리는 속근보다 묵묵히 멍에를 매고 황소걸음을 걷는 지근을 만들고 싶다. 인생의 밭을 가는 일이 폭발적인 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비가 내리는 아침, 그 비에 흠뻑 젖은 만큼 가라앉는 마음을 스스로 추슬러야만 하고, 정오의 뜨거운 태양의 무게를 견디면서 사람들의 사연의 틈바구니를 걸어야만 하고, 가슴을 후벼 파는 저녁 스산한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있다. 마음의 거문고, 마음의 근육을 잡아당겨 거문고를 타듯이 퉁긴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심장의 여섯 겹 근육을 누르고, 튕기고, 뜯어서 연주되는 거문고 소리를 내는 남은 날을 살고 싶다. 어떤 찢어지는 슬픔이라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마음의 근육 하나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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