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다. 어머니의 손칼국수처럼 후루룩 넘어가는, 청양고추로 칼칼하게 길들여진 마음을 마시고 싶다. 햄버거가 한 끼 식사가 되고 때로는 캐나다 AAA 등급의 스테이크를 먹고살아도 나는 어쩔 수 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사람 사는 것은 다 같을 것이다. 삶의 무게를 견디다 보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그리움이 쌓인다. 건강 생각하며 먹는 현미나 잡곡이 섞인 밥이 물릴 때가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지은 흰쌀밥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한남 마트에 가면 ‘이천쌀’을 판다.(지금은 상표권 분쟁 때문에 상표명이 바뀌었다.) 40파운드짜리 한 부대에 30불 정도이다. 처음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 15불짜리 쌀을 들고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있다. 20kg 쌀이 당시 한국에서는 5만 원 정도였다. 밀가루도 감자도 양파도 싸다. 대부분의 식품은 세금이 붙지 않는다. 4리터짜리 우유를 일주일에 두통씩 먹었다. 생필품 가격만을 가지고도 나의 의식 속에 이미 캐나다는 선진국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천에서 벼 종자를 가지고 와서 캘리포니아에서 씨를 뿌리고 수확한 쌀이란다. 한국에서 수입한 이천 쌀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산 이천 쌀이다. 우리는 스스로 이천 쌀이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천쌀은 대다수 이민자들의 삶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대부분 이민자들의 삶은 퍽퍽하다. 밴쿠버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필수코스라고 말하는 캐네디언 로키를 10년 동안 가보지 못했다. 물론 남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겠지만 스스로 납득할만한 사정은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남산타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는 로키의 사계를 보지 않았으면 캐나다 여행을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로키를 실제 있지도 않은 버킷리스트에 올리고 살았다. 한풀이였는지도 모른다. 밴쿠버에서 자동차로 12시간을 꼬박 달려서 밴프에 도착했다. 처음 갈 때는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렸다. 빙하가 있고 에메랄드빛 호수가 있고 야생의 동물들을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곳.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가슴으로만 담을 수 있는 인생 풍경을 만났다. 다음에 올 때는 많이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느리게 담기는 풍경들을 마주 하고 싶었다.
“여기서 자면 좋겠다.”
Fairmont Chateau Lake Louise 페어먼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은 세계 여행자들에게 꿈의 호텔이다. 나에게 묻는다. 이대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은지를 묻는다. 노래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리움을 지킬 줄 아는 당당함
북미에 사는 동양계 여자들의 화장이 가끔씩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서양인들의 화장과 분명히 다르고 한국의 보편적인 스타일도 아니다. 동양인의 눈은 서양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고 입체감이 적다. 가끔씩 동양인을 비하하는 요소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었다. 진한 눈썹과 그을린 피부 톤이 금방 눈에 띈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주눅 들지 않은 자신감이 느껴진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미인의 조건이 아니라 자신만의 표현법으로 미인의 조건을 바꾼 것이다. 건강하고 당당하게 보인다. 예쁘다.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그리움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이고 당당히 자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