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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y 01. 2019

우리에게 필요한 용서와 용기

당신이 지쳐서 잠든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

 민들레가 위태롭다. 바람에 지고 바람에 핀다. 바람에 노란 꽃잎을 떨구고 치마 속을 들춘 것 같은 꽃대궁만 남았다가, 어느새 솜털 같은 바람꽃을 피운다. 봄바람을 타고 훨훨 누군가에게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을 기댈 누군가가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것은 그동안 끈끈했던 결속을 스스로 풀어버리는 것이다.


 민들레가 위험하다. 민달팽이는 밑동부터 서서히 갉아먹을 것이다. 아예 꽃대궁을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환경오염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하기에 무안할 만큼 풀밭의 무법자처럼 생겼다. 색깔이며 모양이며 징글맞다. 달팽이집도 없이 더듬거리며 축축한 몸뚱이를 끌고 다닌다. 끈적거리는 점액을 분비하며 미끄러지듯 기어 다닌다. 민달팽이의 출현은 아내에게도 기겁할 일이다. 텃밭을 지키지 않으면 상추는 뿌리까지 말라버린다.


 “오빠, 나 암 이래.”


 여동생에게 보이스톡이 왔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했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췌장 부근의 임파선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고, 전이된 것이라고 했다. 원래 발생한 부위를 찾을 수 없는 원인불명의 암이라는 것이 의사 진단의 전부다. 3차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를 맞춰서 한국에 방문했다. 공항 면세점에서 예쁜 모자를 샀다. 구찌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파란색 목도리와 어울리는 것으로 골랐다. 선물 받은 목도리지만 내가 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여동생을 암 병동에서 만났다.


 “오빠가 나한테?”


 오빠한테 처음 받은 선물이라며 목도리를 둘러본다. 환자복과 잘 어울린다. 몇 년 전인가, 동생은 보이스톡으로 자신한테 가족이 있기는 한 거냐면서 술에 취한 듯 넋두리를 털어놓았다. 자신은 외롭다고 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24시간 편의점을 시작으로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덜컥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명절에도 만나지 못하는 형제들이 야속하다고 했다. 그 해 설에는 떡국을 먹다가 울었다고도 한다. 혼자 어머니 생일을 챙겨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차에서 통곡을 했다고 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큰 형네서 자란 매제는 말동무라도 만난 것처럼 살아온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오빠, 기도해줘.”


 노란 링거줄을 따라 도는 푸른빛의 주사액은 여동생의 혈관을 타고 온 몸을 헤집어 놓을 것이다. 암세포를 제거하는 수술도 하지 못했다. 2주마다 병원에서 항암주사를 맞는다. 물 한 모금도 역겹고 온 몸이 칼에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고 한다.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리카락을 줍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미웠다고 한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상처 받고 살았다고 한다. 나만 혼자 죽어라고 힘들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살아갈 날들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며 기도해 달라고 했다.


 인천공항에서 밴쿠버 공항까지의 거리 8,188km, 약 10시간을 비행한다. 16시간의 시차가 있다. 내가 내일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하는 시간에 당신의 밤은 시작된다. 당신이 잠드는 시간에 나는 아침을 맞는다. 당신이 지쳐서 잠든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 지구 70억 인구 중에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일 것이다. 아무도 당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이가 없어도 나는 마지막까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세상 모두가 당신을 향해 돌을 던진다 해도 나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위험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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