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봄이 온다.
나에게 가장 절박했던 봄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나는 어제의 그 남자이다. 어제도 걸었던 그 길을 걷는다. 어제도 만났던 사람들을 또 마주친다. 매일 충동처럼 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을 걷는다. 하염없이 나아갈 수 없어서 돌아오는 나의 방식은 오늘도 반복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마주치는 인물들에 대하여 불현듯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영감을 묻는다. 해 질 녘 땅에 내려앉아 축축한 풀밭으로 사라지던 거미들의 행방에 대하여 직관을 묻는다. 살짝 비를 뿌리는 날에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할 수 없었던 감성을 묻는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아니다, 오늘은 아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나를 본다. 오늘도 개똥을 주워 담아 가지 않는 누군가의 교양에 대하여 조금은 관대해진다. 자신의 개가 실례를 하는 것을 못 봤을 수도 있고, 너무 바빴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른 후에 거름이 되어 들꽃 하나를 피울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꿈꾸기도 한다. 겨울을 버티고 가지에 걸려있는 꽃망울에 울컥하는 것은 나이 탓일까. 봇물이 터질 것처럼 나도 때로는 내가 위태롭다고 느낀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때로는 심장이 멈칫거리는 사람을 마주칠 때가 있다. 억겁의 인연이 옷깃을 스치듯, 그런 장면은 느리고 소리는 웅웅거린다. 그러나 새로운 등장인물의 유입은 아닐 것이다. 다음에도 혹시 마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한 번도 부응한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우연처럼 매일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기호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차별성 때문일까. 오늘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여전히 겨자색 체크무늬 양복 옷깃을 세우고 마주 걸어오고 있다. 오늘은 그가 살았을 인생의 무게처럼 느껴졌던 두꺼운 책을 들지 않았다. 대신 무엇인가 입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날리는 무전기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그는 오늘도 의자 등받이에 붙인 동판의 글귀를 읽는다. 사라지고 없는 누군가의 사연이다. 그는 그 사연을 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한 사내가 이 남자 곁에 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뒤를 따라 걷는다. 그가 멈추었을 때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한 번도 재촉하거나 말을 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문득, 사내의 산책이 궁금하다. 그는 과연 어떤 상처를 가지고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의 산책은 시작되었고, 그의 산책은 얼마나 절박한 것일까.
봄이 오고 있다.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봄이 온다. 오늘도 나에게 선물처럼 안겨진 나의 길을 걷는다.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오늘이라는 길에서 봄을 맞는다. 태어나고,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사는 동안 어느 것 하나 익숙해 본 적이 없다. 삶은 언제나 불쑥 나에게 주어졌고, 처음인 것처럼 서툴렀다. 나의 삶은 결국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어제의 봄은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다. 내일의 봄은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가장 절박했던 봄은 오늘의 봄이다. 오늘은 언제나 나에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오늘은 하늘 색깔이 아침에 마시던 커피 향기처럼 더 그윽하게 느껴진다. 햇살에 나부끼듯 영감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고. 직관이 나에게 길을 묻는다. 때로는 멈추어서 보아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감성이 나를 토닥거리고 있다.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을 결코 놓치지 말라고.